여행

유라시아 원정대, 이르쿠츠크를 지나 예카테린부르크로

미키라티나 2016. 8. 2. 08:55


밤 11시 30분에 시베리아횡단 기차는 출발했다. 이르쿠츠크까지 장장 56시간! 꼬박 3일 달려야하는 거리다. 중간 중간 30분 정도 쉬는 역 서너 개를 지났다. 역에서면 승객들 대부분은 내려 굳었던 몸을 풀고 이웃과 인사도 나누었다. 대원들은 2인실과 4인실 6인실로 나누어 탔다. 중간에 위치한 식당 칸에서 만나 함께 식사를 하였다. 아침은 객차로 배달까지 해주었다. 기차를 타기 전에는 객차 안에서 얼마나 지루할까 걱정했었다. 하지만 지루한 듯 했지만 막상 차창으로 펼쳐지는 이국적 풍광에 오롯이 자신의 지난날을 되새김질 하는 황금 같은 여유로 여겨졌다.


사실 지루할 틈이 없었다. 창밖으로는 하얀 자작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대지를 지났다. 이틀째부터는 빗방울이 떨어졌다. 동토라 하얀 눈으로 덮였을 시베리아 평원은 빗물 속에 뿌옇게 서 있었다. 마치 물감을 풀어놓은 듯, 파스텔로 칠한 듯 초록바탕에 보라, 노랑, 분홍, 하얀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짧은 여름이라 조금이라도 계절을 더 누리기 위해 서로 경쟁하듯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기차 안에선 많은 일을 할 수 없지만 대원들은 모두 생동감이 넘쳤다. 부산을 출발할 때만해도 어색했던 사람들은 그 며칠사이에 마치 오랜 친구처럼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며 조금씩 더 다가섰다. 대륙은 미지의 세계로 물음표를 던지지만 갇힌 공간속의 대원들은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기차는 타이거 초원지대를 지났다. 역이 가까워지면 나무로 만든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선 마을이 다가왔다. 비는 오락가락하고 고도는 점점 더 높아졌다. 해발 3000m를 통과하더니 서서히 내려갔다. 저녁 무렵엔 장대비가 쏟아지더니 비개인후 초원위로 무지개가 떴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원정대 앞길에 좋은 소식을 전해준 듯 다들 기뻐했다. 이후 해는 졌지만 붉은 노을은 밤 10시가 되도록 하늘을 발갛게 물들였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백야다. 백야현상은 앞으로 계속되었다. 새벽 서너 시에도 환한 하늘 덕분에 일찍 깨었다.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보내고 아침 6시.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56시간 만에 도착한 것이다.


역에는 동양적인 전통 옷을 입은 원주민들과 이르쿠츠크 정부 관계자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역에 내리자마자 손님을 맞이하는 환영식이 거창하게 펼쳐졌다. 몹시도 반가웠다. 토요일 그것도 이른 아침에 쉬지도 못하고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신 분들에 고마움이 밀려왔다. 이르쿠츠크. 도시 건물마다 355주년이라는 광고가 보였다. 오래된 도시다. 이곳은 ‘시베리아의 진주’라는 별칭이 붙은 바이칼 호수로 가는 관문이다. 조용한 아침거리를 지나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만든 니콜라이 3세 동상이 있는 공원을 찾았다. 앙가라 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도시를 관통하는 앙가라 강은 바이칼 호수에서 흘러나온다.


이르쿠츠크는 천혜의 관광자원인 바이칼 호수를 비롯한 은 볼거리로 늘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다. 러시아 한가운데 유럽과 아시아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에서 직항이 있어 친숙한 곳이다. 인구 70만 명 중에서 학생이 10만 명이라고 할 정도로 교육의 도시다. 사람들은 꾸밈이 없고 순수하다. 우유와 치즈로 유명하며 2009년에 현대와 기아차가 러시아에 진출 후 한국 차가 많이 들어왔다.


여기서 잠깐. 블라디보스톡에서부터 거리에서 보인 이상한 점 하나는 거리의 자동차들이 핸들이 왼쪽에 있기도 하고 오른쪽에 있기도 해서 어떻게 교통질서가 확립이 되나 하는 점이었다. 사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다들 운전을 능숙하게 잘해나가서 더 재미있게 느껴졌다. 아마도 대도시라면 어림도 없을 것이다.

 

바이칼 호수는 살아 숨 쉬는 호수라고 한다. 올해만 해도 지진이 2000번이나 발생했다고 한다. 가장 깊은 곳은 6000m에 이르는 지구상에서 가장 깊은 담수호다. 예부터 원시인들이 터를 잡았을 만큼 역사가 깊다. 그리고 우리민족의 시원지가 이곳이라는 학설이 을 정도로 우리나라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혹독한 자연환경 때문에 시베리아 유배지로 더 유명했다. 이르쿠츠크는 ‘동쪽으로 가는’ 뜻을 가진 이르쿠트 강에서 나왔다고 한다. 바이칼호수로 336개의 강이 흘러들어 간다. 그러나 2016년 4월의 지진으로 5개의 강이 없어져서 지금은 361개다. 막상 바이칼 호수를 보니 멀리 수평선이 펼쳐진 것이 딱 바다다. 그래서 예로부터 신성한 바다로 불려왔다. 호수를 감싸는 성스러운 기운에 사람들은 이곳을 신적인 존재로 여겼다.


이르쿠츠크 사람들은 바이칼 호수 덕분에 감수성이 뛰어나다고 한다. 도심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축소판이라 할 만큼 우아한 목조건물이 발달되어있는 아름다운 도시다. 예전에는 더 많았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보호재로 지정하고 있다. 독특한 양식의 목조주택은 집집마다 가문마다 고유의 문양으로 나무를 레이스처럼 촘촘하게 새겨 장식하고 있다. 겨울엔 2m의 두께로 언다는 호수의 추위에 나무집은 춥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이중으로 지은 집이라 오히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고 한다. 이곳은 여름엔 40도 겨울엔 영하 40도로 기온차가 무척 크다. 집을 짓는데 기름기가 많은 자작나무는 화재의 위험성 때문에 집 재료로 쓰지 않는다고 한다. 러시아 숲 대부분을 이루는 자작나무는 하얀 수피를 가지고 있다. 부족한 빛을 어떻게든 받으려고 높게 곧게 자란다. 따라서 키도 크고 하얀 피부를 가진 러시아 미녀라는 별명이 있다. 겨울에는 덮인 눈에 반사되어 나무 아래만 새카맣게 탄다고 한다.


기차에서 내려 숙소인 리스트 비앙카 마을로 향했다. 해발 약 1300m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바이칼 호숫가에 위치하여 여름 휴양지로 인기 있다. 가는 길은 곧게 도로가 나있는데 이는 미, 러 정상회담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리스트 비앙카로 가는 길에 있는 딸지 박물관에 들렀다. 빽빽한 전나무와 자작나무 숲속에 원시부터 시대별로 만들어진 주거지를 복원해 놓은 야외 박물관이다. 산책로 같은 길을 따라 민속촌처럼 시대별로 나무로 만든 집들이 있었다.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천막집처럼 구조가 비슷하였다. 나무 기둥들을 엮고 그 위를 두꺼운 나무껍질로 혹은 짐승 가죽을 덮었다. 그 조그만 집에서 원시인들이 그 혹독한 겨울을 날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생존했을 상황이 상상되었다.

 


식량창고, 겨울 집, 사냥꾼의 집 등 숲에서 살았던 옛 사람들의 발자취가 그대로 전해져왔다. 바이칼 호 주면에 에벤키 족, 브리야트 족 등 100여 부족이 있었다고 한다. 풍장풍습을 가지고 있다는 브리야트 족 주거지를 들어서자 눈에 많이 익은 장승 하나가 서있었다. 브리야트 족이 한민족의 시원일 거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유사성이 많다고 한다. 서울대 이용구 교수 연구에 따르면 DNA 분석을 결과 당뇨병 유전지가 우리나라와 일치하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바이칼 호수 주변인 울란우에 민족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더 과학적인 연구로 시원을 찾아내어 우리 민족이 어디에서 왔는지 유래가 밝혀지길 바래본다.



바이칼 호수는 조정래의 아리랑, 이광수의 유정, 전쟁과 평화의 무대에서 배경으로 나온다. 마을에 도착해보니 여름 휴양지답게 수영복을 입은 벌거숭이 사람들이 호수에 몸을 담그고 있다. 물빛이 무척이나 투명하다. 담수호에는 물을 걸러주는 미생물이 있어 늘 이처럼 투명한 상태라고 한다. 손을 담그면 3년 마시면 5년 몸을 담그면 10년 젊어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세 가지를 한 번에 다하면 효능이 없으니 한 가지만 하라는 안내자의 말에 손을 담가보려 호숫가로 내려갔다. 모래대신 자잘한 자갈돌이 펼쳐져 있었다. 투명한 물이 마치 유리 같았다. 약간 차가웠지만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몸을 담구고 수영을 즐겼다. 하지만 금방 추워져 오래 있지는 못하고 호숫가는 해바라기 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마치 한여름 해운대 백사장처럼 보였다. 바이칼 호수를 관광할 수 있는 이르쿠츠크는 2007년부터 대한항공 직항이 생겼다.



대학생들은 이곳에서 이르쿠츠크 대학생들과 만남의 장을 가졌다. 바다처럼 넓은 호숫가에서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시원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니 56시간 갇혀있었던 기차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어둑어둑해졌다. 낮엔 그처럼 따가운 햇살아래 일광욕을 즐겼지만 밤이 되자 무척 추웠다. 방에 난로를 켤 정도라니. 새벽 4시경부터 날이 밝았다. 짧은 여름밤이다.


호숫가에서 신선한 공기와 신성한 바이칼 호수의 기를 듬뿍 받고 다시 시내로 돌아갔다. 이르쿠츠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축소판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아름다운 도시다. 그렇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역사가 있다. 1825년 12월, 입헌군주제를 외치며 귀족장교들이 니콜라이 1세의 대관식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불린다. 모두 600명의 귀족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고 주동자 5명이 즉결 처형당했다. 120명이 시베리아로 유배를 당하고 나머지는 전쟁터에 내몰렸다. 그렇게 유배로 온 귀족들이 이곳에서 정착하면서 귀족문화가 들어와 도시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이곳에 유배당했던 트루베츠코이가 살았던 목조집이 그대로 남아 있어 오늘날 박물관으로 개방되고 있다.



이 집은 당시 유배귀족들의 생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유배귀족을 찾아온 아내들의 순애보도 유명하다. 아내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갖은 고생을 하며 남편을 찾아 6000km 달려 이곳에 정착했다. 1층은 남편이 2층은 아내가 살았고 20명의 하녀를 두었다. 주말마다 연주회를 열기도 하고 구연동화도 하고 동화도 써서 자녀들을 공부시켰다. 그 영향으로 이르쿠츠크는 교육의 도시가 되었다.


집안에는 그들이 쓰던 갖가지 사연의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톨스토이의 집안이기도 한 쟁쟁한 가문이었던 덕분에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아한 기품이 묻어났다. 특히 유배지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채웠던 족쇄를 녹여 만든 반지, 세계에서 2대뿐인 포르테피아노 등도 인상적이었다. 유배되었던 귀족들 중 40명이 생존하였고 그중 4명이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나머지는 이곳에서 정착했다. 그들이 살았던 집은 시에 기증되었고 2005년 역사바로잡기 일환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협업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거리에는 멋진 문양으로 장식된 나무 집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가문을 나타내기도 하고 당시의 부의 상징이기도 했던 나무 장식들은 이르쿠츠크에 독특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이루고 있었다. 1878년 대화재로 많은 목조건물이 소실된 후 목재주택은 보호받고 있다.

 

이르쿠츠크에 내렸던 가장 큰 이유는 부산 알리기 행사를 위해서였다. 이 도시의 예술문화극장인 후도즈베스트리니 극장에서 시민들과 함께하는 큰 행사다. 행사는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 “국제시장”을 무료로 상영하는 것과 함께 한국음식소개도 있다. 극장에 도착해서 준비를 시민들을 맞았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작지 않은 극장 로비는 한국음식 맛보기에 성황을 이루었다. 이곳을 찾은 시민들은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대학생 대원들과 사진 찍느라 바쁜가하면 김치, 닭 강정, 김밥 등 쉽게 맛볼 수 없는 한국음식들과 음료수 등을 맛보며 원정 대원들과 즐거운 교류를 나누었다. 러시아 시민들 속에 고려인들도 많이 보였다.




영화 상영 전 창원대 무용과가 준비한 가요와 전통무용으로 시민들의 환호성이 극장을 뒤흔들었다. 세르게이 렙첸코 주지사와 손 일석 주 이르쿠츠크 대한민국 총 영사관 영사님 그리고 권 오성 원정대장님의 환영사와 대원들의 무대인사가 이어지고 영화의 막이 올랐다. 대원들은 다시 역으로 달려가 다음 행선지인 노보시비르스크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33시간의 긴 여정이다. 기차를 타고 내리며를 몇 번 반복하다보니 기차생활이 이제 익숙해졌다. 졸기 딱 좋은 은근한 덜컹거림은 계속 잠을 불렀다. 그러나 잠과 잡담으로 보내기엔 아까운 시간들이다. 막간을 이용하여 대원들의 재능기부 강의도 있었다. 기차 안에서의 오붓한 인생 선배님들의 유익한 강의는 의외의 수확이었다. 창밖으로는 지치지도 않는 초록 숲과 흐드러진 꽃과 강이 흘러갔다. 밤이 되어도 여전히 훤한 창밖은 새벽 4시경에 다시 환해졌다. 백야의 도시로 더 가까이 가는 중이었다.


 


 



이튿날 밤 11시 40분 경. 노보시비르스크 역에 도착했다. 여정의 중간 정도 지나다보니 피로가 많이 몰려왔다. 이곳은 러시아 제 3 도시다. 1893년 시작된 인구 150만 명의 큰 도시다. 기계 산업도시로서 지금까지 지나온 도시들에 비해 상당히 현대적이고 질서정연한 전형적인 도시모습을 갖추고 있다. 대한무역공사(KOTRA)가 이곳과 모스크바에 무역관을 둘 만큼 경제활동이 활발한 곳이다. 이곳에서 한 번 더 “국제시장”을 상영하였다. 빠비에다 예술 극장에서 상영하기로 했다. 멋진 예술작품 같은 외양을 가진 예술극장에서 노보시비르스크 시민들과 만나는 것이다. 특히 젊은 친구들이 많이 보였다. 원정대와 러시아 젊은이들의 k-pop 공연은 극장 가득 끓어오르는 젊음을 활활 태웠다.




영화 상영 전에 노보시비르스크의 정부 관계자들이 축사를 하였다. 니콜라이 알렉세이비치는 “한국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김치와 불고기가 인상적이었다. 원정대를 따뜻하게 환영한다. 오늘 부산영화와 더불어 한국문화도 보여줄 것이다. 비록 원정대들은 하루만 있었지만 매우 뜻 깊은 날이다. 나라와 도시가 깊은 우정을 나눠보길 바란다.” 라며 말을 맺었다.


그 뒤를 이어 안나 테레슈쿠바 문화부 국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이곳은 시설이 제일 좋은 영화관이다. 한국영화를 소개해주어서 정말 감사드린다. 많은 나라들 별로 언어와 문화가 다 다르지만 공통언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술이다. 예술과 문화를 전 러시아에 전해주셔서 감사드린다.”며 뜻 깊은 인사를 하였다.


올레드 제 1부시장 레나지 자하로브씨는 “노보시비르스크의 정부와 시민 대표로서 시베리아의 수도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 언제나 우리는 외국 손님들을 기쁘게 맞이한다. 한국인과의 만남이 연례행사가 되었다. 계속해서 대를 이어 교류 협력을 이어가길 바란다. 시베리아의 주도이자 주요 연방정부 대표부가 이곳에 있다. 일회성이 아니라 계속 이어가길 바란다. 여러분들은 여정을 통해 새로운 만남과 인생관을 넓히며 행복한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 며 멋진 축사를 보태셨다. 시베리아 최대의 공업도시이자 문화도시인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영화를 상영하며 교류의 첫 발걸음을 뗀 것이다.


원정대원들은 모두 무대로 올라가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기차역으로 갔다. 하루 머물지 않고 다시 역으로 간 것이다. 역에서는 우리를 환송하기 위해 정부와 관계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17도로 쌀쌀해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배웅 나온 것이다. 양국 대표들의 환송사와 답사를 주고받은 뒤 이르쿠츠크 청소년 합창단이 불러주는 “아름다운 세상” 노래를 끝으로 헤어졌다. 역마다 환영과 환송이 계속되자 무척 힘이 났다. 비록 머문 순간은 짧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받은 도시였다. 다음 역은 이름도 예쁜 예카테린부르크다. 20시간 정도 걸린다. 그쯤이야! 이제는 다들 노련한 승객들이 되었다. 가는 역 중간에 서는 역마다 러시아 알파벳으로 써진 역 이름이 살짝 눈에 들어오기까지 했다. 우랄 산맥을 넘어 유라시아 분기점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평원을 달려 오후 1시경에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했다. 날씨는 화창했다. 예카테린부르크는 표트르 대제와 함께 가장 강력한 군주였던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름에서 딴 도시다. 러시아 제 4의 도시로 아시아와 유럽의 분기점이다. 즉 이 도시는 유럽의 종점이자 아시아의 시작이다. 따라서 2018년 치러질 러시아 월드컵 때도 경기장은 이곳까지만 만들어 지고 동쪽으로 더 이상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1723년 세워진 인구 140만 명의 대도시로 우랄 중심 도시다.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광공업도시로 유명하다.


원정대는 예카테린부르크에 있는 유럽-아시아 경계비 17km에서 부산 표지판 제막식을 할 것이다.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갑자기 날씨가 어두워지더니 급기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비에도 원정대를 환영하는 화려한 초록의상의 “우랄의 여왕”은 쏟아지는 비가 우리를 환영하는 우랄의 선물이라고 했다. 빵과 소금을 내어주고 색색의 리본을 나누어 주었다. 나무와 철책에 묶으면 다시 우랄로 돌아온다는 풍습이 있다. 온통 알록달록한 리본으로 묶인 나무와 철책이 있는 그 장소는 신성한 기운이 맴돌았다. 다시 돌아온다니! 우랄이 부산원정대를 계속 불러들이길 기원하며 리본을 묶었다.




그리고 부산표지판 제막식을 했다. “유라시아 부산 원정대 5533km” 라고 쓰인 팻말의 화살표는 부산을 가리키고 있었다.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하얀 직선이 선명한 유라시아 분기점에 섰다. 이번 원정의 핵심 단어인 유라시아! 그 유라시아를 포함한 시베리아는 또 얼마나 광활한가! 몇날며칠을 달려와 서니 이곳부터 유럽이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하루를 묵고 또 다시 기차를 타야한다. 29시간 후에는 드디어 모스크바에 입성할 것이다. 원정의 반 이상이 지나갔다. 27일 오전 6시 48분. 새로운 설렘을 안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