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산끄리스또발 데 라스까사스와 수미데로 캐넌, 치아빠스 주

미키라티나 2010. 9. 7. 02:24

산끄리스또발 데 라스까사스는 해발 약 2600m에 위치하여 몹시 추운 곳이다. 매우 긴 이름의 이 도시는 원주민들 보호에 앞장섰던 바르똘로메 데 라스까사스 신부를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 이것은 1829년까지 치아빠스 주의 주도였다.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으며 유까딴 주, 과떼말라에 영입되기도 했다. 이 도시의 첫 인상은 강한 마야 원주민 알록달록한 전통색채와 식민지 풍의 도시 색채가 조화를 이룬 평화스런 모습니다. 스페인 정복 때부터 시작된 오래된 도시지만 규모도 작고 길이 예뻐 걸어서 다 돌아볼 수 있다. 마치 이웃나라 과떼말라의 안띠구아와 분위기가 아주 흡사하다.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 시의 전경

                          길 중앙에 대성당과 시청이 보인다

                                                 도심 진입로 풍경

                           중앙시장 풍경, 아이를 업은 여인의 모습

 

 

 

 

화려한 색채로 벽을 칠하고 검붉은 기와지붕에 커다란 창문으로 장식된 단층 건물들과 바로크 풍의 성당들 그리고 돌로 포장된 길바닥은 마치 500년 전 식민지 시대로 되돌아가는 듯하다. 거리에는 배낭을 짊어진 외국인들과 양 갈래 머리를 땋아 머리끝을 얌전히 댕기로 묶고 모자를 쓴 전통의상 차림의 마야 여인들이 뒤섞여 다니고 있다. 간혹 아이를 업고 머리에 짐을 인 채 걸어가는 조그만 아낙들의 모습에서 옛 우리네 시골 풍경이 보여 신기하다. 언뜻 보면 생김새도 비슷한 것이 친근감마저 든다. 멕시코의 다른 도시들과 확연한 차이가 보인다. 한 여름에도 한기가 드는 곳이지만 때가 꼬질꼬질한 차림의 원주민 아이들은 거의가 맨발이다. 얄궂은 껌과 사탕을 들고 다니며 사달라고 수줍게 내민다. 


도시 규모에 비해 성당이 아주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대성당은 1528년에서 1533년에 완공한 바로크 양식으로 노란색 외관이 마치 동화에 등장하는 무대 같다. 스페인풍이라기보다 원주민 풍이 더 짙은 곳이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산또도밍고 성당이 있다. 내부에 있는 온통 금박을 입힌 나무설교제단이 유명하다. 성당에 딸린 수도원 안에 고원 치아빠스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19세기까지의 선 스페인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들러볼만한 가치가 있다.

                          

                                         노란색으로 칠해진 대성당의 모습

 

성모 승천의 날 기념행렬

 

성당 입구와 마당은 원주민 민예품노점상들의 상설좌판이다. 환상적인 색채와 많은 노동을 한 아름다운 직물들이 가장 인상적이다. 마야 여인들은 일일이 손으로 옷감을 짜면서 색실을 이용해 무늬도 함께 넣는다. 이를 위삘이라 부르는데 주로 상의로 입는다. 위삘의 무늬는 각 부족마다 상징색이 다르고 무늬도 다르다. 하지만 무늬에는 일정한 양식이 있다. 사각 혹은 마름모꼴로 무늬를 넣는데 동서남북의 색이 일정하다. 가장 신성한 색인 초록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이 나뉘고 각각 상징 색으로 표현한다. 즉,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은 빨강, 북쪽은 하양, 태양이 지고 죽은이들이 가는 곳인 서쪽은 검정, 남쪽은 노랑이다. 마치 우리네 색동을 보는 듯 전혀 낯설지 않고 반갑게만 느껴진다. 위필을 비롯하여 손수 만든 화려한 민예품들 사이로 치아빠스가 주 생산지인 호박(보석) 장신구들과 반란군인 사빠띠스따(EZLN)들의 인형들도 눈에 띈다. 최근엔 90년대보다 많이 상업화 되어있어 눈에 띄게 달라졌다.

 

                                                   민예품 파는 여인들

 

 

사파티스타 인형  


또 한곳 들러야한다면 나 볼룸 박물관이다. 라칸돈 원주민들과의 우호관계를 지속했던 마야 고고학자 프란스 볼룸과 그의 아내이자 사진작가인 게르투르디스 볼롬이 세운 박물관이다. 5000여권에 이르는 마야문명에 대한 서적들이 전시된 도서관과 13년간의 마야유적을 발굴하면서 수집했던 유물들, 비디오, 사진 등을 관람할 수 있다. 학자와 학생들에게 항상 숙소를 개방한다고 한다.


최근엔 전통약초박물관도 생겼다. 마야인들 조상 대대로 해왔던 치료약초를 지금도 이어가는 박물관 겸 약국이기도 하다. 워낙에 가난한 이들이라 병원 갈 돈은 없으니 대체의학과 약초로 치료를 한다.


1994년 1월 1일 이곳에서 EZLN(사빠띠스따)들이 봉기를 했다. 따라서 산끄리스또발 데 라스까사스를 주변으로 사빠띠스따들의 거점과 연결되어 있다. 배낭여행자나 취재기자나 모두 이곳을 다 거쳐서 라깐돈 정글이든 고산이건 더 깊은 마야로 들어갈 수 있다. 어쨌든 산끄리스또발 데 라스까사스를 들어왔다면 갈 데가 정말 많아 고민이다. 멕시코가 자랑하는 수미데로 캐넌은 그중 한 곳이다. 캐넌을 가려면 역시 이름도 긴 뚝스뜰라 구띠에레스 시로 내려가야 한다.


식민지 시대에는 치아빠스와 과떼말라는 하나의 주였다. 독립전쟁 당시 치아빠스와 과떼말라가 독립을 선언하였고 멕시코는 3개월 이후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1848년 구띠에레스 장군이 독립을 다시 선언한 뒤 치아빠스는 멕시코에 붙었다. 그리하여 1892년부터 뚝스뜰라 구띠에레스가 치아빠스 주의 새로운 주도가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산끄리스또발 데 라스까사스에서 뚝스뜰라 구띠에레스 시까지는 89km로 2006년 이 두 도시사이에 새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1시간이면 간다. 고속도로라고 하지만 좀 아찔하다. 산허리에 걸린 구름 속 같은 안개를 거쳐 나오면 저 아래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평원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전보다는 나아졌지만 그래도 구불거리는 도로는 아찔하다. 뚝스뜰라 구띠에레스는 고도가 낮아 일 년 내내 아주 더운 기후를 가지고 있다. 좀 전까지 두터운 스웨터와 오리털 점퍼를 껴입었는데 이곳은 8월 말복더위다. 하지만 1000m에 이르는 낭떠러지 협곡으로 유명한 수미데로 캐넌 투어와 전망대가 있어 관광객들을 부른다.


시내에서 외곽으로 15km를 가면 치아빠 데 꼬르소라고 하는 작은 마을이 있다. 그곳의 선착장에서 캐넌으로 들어가는 배를 탄다. 이 협곡은 그리할바 강으로 들어온 물이 인공호수에 고여 있는데 배를 타고 물길 35km를 달리며 구경하는 것이다. 양 옆으로 1000m 높이의 절벽이 참으로 장관이다. 그리고 물길 옆으로는 치아파스 동물들인 악어, 야생 원숭이, 새들이 보인다. 이곳 절벽은 수천만 년 전의 자연의 작품이다. 하지만 천길 절벽에는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다. 때는 스페인 정복기로 원래 이곳에 살던 마야 원주민들은 스페인과의 전투로 패색이 짙어지자 어린아이,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모두 이곳에 몸을 던졌다는 슬픈 이야기다. 물길 마지막에 이르는 곳이 마누엘 모레노 또레스 댐이다. 주변에 2700m 높이의 병풍처럼 쳐진 산맥들이 둘러싸고 있다.

                                    

                                         수미데로 캐넌의 장관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캐넌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수미데로 캐넌 역시 장관이다. 협곡을 따라 5개의 전망대가 있지만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 전망대가 바로 1000m 지점의 낭떠러지 위다. 꼭대기에서 부는 바람은 시원하지만 마야인들이 가장 신성시했던 초록 옥빛의 물이 뱀처럼 흘러가는 협곡을 보면 뒷골이 서늘하다. 패망한 마야인들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질 때 목숨을 잃는 두려움보다 나라를 빼앗기는 서러움이 더 컸으리라. 그때 검은 새 한 마리가 삐익~ 울음을 토하며 날아간다. 그들의 설움이 저 아래 협곡에서 메아리치는 듯하다.  

  

살아 있는 혁명, 반골의 땅 치아빠스 주


치아빠스 주는 역사적으로 마야 인들의 골수반골의 땅이다. 스페인에 점령당한 이래 18세기에 계급전쟁이라 불리만큼 격렬한 유혈투쟁이 있었고 지금도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는다.


모두는 아니지만 일부 원주민들은 여전히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원주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멕시코현실이다. 그래서 원주민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치아빠스의 EZLN이다. 오늘날 멕시코 시위대들은 언제나 그 정신적 지주로서 사빠따(농민출신 혁명가)와 체 게바라 그리고 마르꼬스를 깃발에, 피켓에 들고 시위에 나선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혁명가로 숭앙받고 있으며 그 순수한 혁명의 근원은 바로 사빠따다. EZLN 즉 사빠띠스따들이 태동한 원인은 바로 사빠따와 혁명이 만들었지만 1994년 폐기된 멕시코 헌법 27조 ‘토지는 농민에게’를 되살리고자 하는 것이다. 


94년 1월. 치아빠스 정글과 산지에서 이 땅에 살면서도 핍박 받는 원주민의 실체를 온 천하에 알리며 분연히 일어난 반란자들이 있었다. 그 이후 12일간의 전투가 있었지만 총과 총알도 변변치 않은,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무장을 하고 겨우 마체떼(정글 칼)로 일어선 EZLN과 부사령관 마르꼬스다. 이들은 땅과 자유를 외치는 혁명가 에밀리아노 사빠따의 정신을 그대로 물려받아 사빠띠스따라고 불렸다. 


스키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마르꼬스와 EZLN은 다른 나라의 무장게릴라와는 달리 신비주의 전략과 총 한방 쏘지 않고 인터넷을 통한 언론 플레이로 지난 10여 년 간 치아빠스의 정글 속에 은둔하며 전 세계에 EZLN과 치아빠스 원주민의 실상을 알렸다. 필자는 2005년 8월, 부사령관 마르꼬스 취재에 성공한 적이 있다. 2006

년 대선을 앞두고 EZLN과 마르꼬스가 침묵을 깨고 정글을 돌며 집회를 가질 때 EZLN의 한 마을을 찾아가 며칠을 기다린 끝에 그를 인터뷰 하였다.   

 

2003년부터 EZLN의 본거지가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에서 까라꼴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리고 훈따 데 부엔 고비에르노는 "좋은 정부회의"라는 뜻으로 마르꼬스가 즐겨 쓰는 나쁜 정부의 반대의미다.


일행이 찾아간 EZLN의 마을엔 이들의 영혼이자 영웅인 사빠따가 그려져 있다. 곳곳에 사빠띠스따들의 마을임을 알 수 있는 흔적들. 매일 비가 그치고 나면 곱게 무지개가 뜬다. 참 맑은 공기. 사빠띠스따 집회소식을 접한 마르꼬스와 EZLN의 팬들은 밤이 늦도록 하루 또는 이틀 걸리는 긴 여정을 마다하고 전국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지난 2001년 3월. 첫 봉기이후 지명수배로 숨어 지내던 라깐돈 정글에서 나와 평화대장정을 펼친 후 멕시코시티에 입성하여 소깔로 중앙광장에서 울려 펴지던 그 낭랑한 목소리와 살아있는 눈빛의 마르꼬스는 조금 변해 있었다. 날카롭던 눈매는 훨씬 부드러워졌고 목소리도 좀 탁해졌다. 하지만 그 기개는 여전하다. 그리고 사람들을 많이 웃겼다. 코미디언처럼. 훨씬 여유가 있어 보인다.

 

                                 말을 타고 등장한 부사령관 마르코스

 

 

 


변화의 바람은 의식의 변화부터 시작된다. 가난은 가난을 낳고 절망에 빠져들게 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땅, 자유 그리고 교육과 의료다. 사람답게 교육받고 사람답게 치료받고자 하는 것. 그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땅에서 내쫓기지 않고 살아가는 것. 몇몇 부자 목장 주들에게 다 빼앗기고 절망하며 살아가지 않기. 이런 의식의 변화야 말로 지난 10여 년 간 불어온 바람인 것이다.

 

 

모든 집회가 다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한 원주민의 집에 들렀다. 문을 들어서자 그냥 흙바닥위에 돌로 괴어 놓은 부뚜막이 있고 그 앞에 조그마한 나무 식탁이 있었다. 부엌이다. 옹색한 식탁 위에는 알록달록한 싸구려 중국제 플라스틱 그릇과 접시들이 마치 소꿉 장난감처럼 놓여 있다. 부뚜막에 놓인 또르띠야 판과 옥수수 반죽, 소금 봉지, 그 옆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감자, 양파, 고추 몇 개. 페인트 통이었던 물 양동이. 요리할 때 쓰는 주걱과 무디게 생긴 칼 외에는 그 흔한 숟가락, 포크도 보이지 않는다. 하잘 것 없어 보이지만 이들에게는 꽤 쓰임새가 많은 부엌살림들이 애처로운 그들의 생활을 잘 이야기 하고 있다. 


그 옆으로 난 통로는 방이다. 마찬가지로 흙바닥위에 침대가 두개 있고 옷가지를 잔뜩 걸어 논 빨래 줄로 어른과 아이 침대를 나누어 놓은 방. 침대 머리맡에는 성모님 사진이 붙어 있다. TV는커녕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다. 물은 근처를 흐르는 냇물을 길어다 마신다. 이들이 지니고 있는 이 가난한 살림살이들은 만약 불이 나 다 타버려도 하나도 아까울 것 같지 않았다.


새까맣게 그을린 찌그러진 솥을 화덕에 올리고 나무를 때서 요리를 한다. 숟가락도 없이 손으로 집어 먹는 생활. 흙바닥에 나무 침대. 걸린 옷가지를 빼면 도대체 살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이것이 마르꼬스와 EZLN이 온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치아빠스 원주민들 더 나아가 멕시코 원주민들의 생활상이다. 10여 년 간 뭐가 변했을까? 세상이 멕시코의 남부의 가난한 주 치아빠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 정도?

 

                      까맣게 그을린 솥이 놓인 화덕. 솥 하나가 주방살림.

사실 이 후 몇 년 동안 멕시코 여러 지방의 시골 원주민 집들을 방문하였는데 대부분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흙바닥에 나무판자나 흙벽돌 집.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살림살이와 전기도 상수도도 없는 그런 시골집들을 보고 돌아오는 날이면 스스로 너무나 많은 것을 지니고 사는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정말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물건은 몇 가지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