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멕시코에 두 명의 새 대통령 취임

미키라티나 2006. 11. 26. 12:09

 

 

지난 20일부터 멕시코 전국은 한달이나 일찍 들이닥친 이상 한파로 기온이 뚜욱 떨어졌다. 그날이후 지금까지 동사한 사람만도 7명. 멕시코시티 주변의 3000m 고지에는 이미 첫눈이 내렸다. 멕시코가 무척이나 더운 나라일거라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고 있는 요즘이다. 아마 요즘 도착한 외국여행객들은 멕시코의 추위에 몹시 당황할 것으로 짐작된다. 멕시코시티의 햇살 따스한 거리에서 11월인데도 두툼한 점퍼에 털모자와 장갑으로 무장한 옷차림은 아직 낯설기는 하지만 곧 익숙해 질 것이다.


물론 한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고원 사막에 위치한 북부도시들은 이미 영하로 진입했다. 작년에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며 동사자가 60여명이나 있었는데...도시의 노숙자나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에겐 추위가  겨울의 가장 큰 적이다. 모두 무사히 긴 겨울 잘 지나시길.


오늘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한 나라에 들어선 두 개의 정부 얘기다.

 

  소칼로 국립궁전 건물 앞에서 취임식하고 있는 로페스 오브라도르


지난 11월 20일 월요일은 해마다 1910년에 발발한 멕시코 혁명을 기념하는 96주년 되는 국경일이었다. 이미 그 전 주 금요일부터 멕시코시티는 황금휴가를 맞아 휴양지로 탈출러시를 이루었었다.


하지만 이날 지난 7월 대선에서 0.56%라는 근소한 표차이로 탈락한 이후 PRD(민주혁명당) 소속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선 후보가 "합법적 대통령"이라는 이름으로 취임식을 할 것임을 선언했었다.


오후 3시경. 갑작스레 떨어진 추위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지자들은 겹겹이 껴입고 멕시코시티 중앙 광장인 소칼로로 모여들었다. 그 속에 필자도 끼었다. 추운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하지만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문제였다. 도대체 합법적 대통령 취임이라니. 한 나라에 대통령이 둘? 이런 괴이한 일이 있나. 무릎을 덮는 오리털 파카에 털목도리, 장갑. 잔뜩 무장해서 둔한 몸을 뒤뚱거리며 소칼로로 향했다.

 

소칼로로 향하는 진입로에는 혁명 기념일을 맞아 혁명 당시의 사진들을 전시해 놓았다. 사진 속에는 미국 역사상 유밀무일하게 국경을 넘어 미국 도시를 공략한 죄(?)로 '북부의 괴수'로서 수배령이 내렸던 판쵸 비야(Pancho Villa)와 오늘날 EZLN의 정신적 근원이 되는 사파타(E.Zapata) 등 혁명영웅들과 혁명군들의 모습들이 보인다.


멕시코는 거의 100년 전에 치른 "멕시코혁명"만으로도 다른 여타 라틴 국가에 비해 멕시코라는 자국에 대한 확실한 정체성과 애국심이 매우 강한 나라다.


가는 길에 멀리 치아파스에서 올라온 전통의상 차림의 고산지대 마야 원주민 아낙들도 보이고 일부러 PRD 당의 상징색인 노란 옷을 입고 온 시민들도 보인다. 주부들, 노인들, 대학생과 젊은이들 등등 대체로 다양한 계층이지만 차림새로 미루어보아 아무래도 서민층이 더 많은 듯하다.

 

쫑쫑 땋아 내린 레게머리의 히피들 사이로 탈색한 머리카락을 쭈빗 세운 펑크족도 보이고 무지개 깃발을 높이 든 동성애 클럽도 보인다. 로페스 오브라도는 어떤 성격의 단체라도 다 인정했었다(끌어 들였다!). 거리엔 노란 깃발이 물결치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도 대통령이 되지 못한 로페스 오브라도르의 인기를 반영이라도 하듯 온갖 기념품이 팔리고 있었다.

 

 

     오브라도르 기념 주화. 대통령이라고 써 있다.

 

 

    오브라도르가 대통령 현장을 감고 있는 사진과 배지.


빨강, 하양, 초록 3색의 대통령 현장을 어깨에 걸친 모습의 사진이 찍힌 노란 티셔츠를 비롯하여 배지, 포스터, 기념주화 심지어 가방까지. 온통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이라는 구호가 난무를 한다.

 

 

     대통령 당선자 칼데론의 얼굴이 그려진 포스터에는 "망할 사기극은 그만", "못할것이다"라는

구호가 새겨져 있다. 대통령 현장을 두른 이가 오브라도르.

 

 

   PRD 의 가면을 쓰고 있는 상인

 

 

    그 와중에 에콰도르 오따발로에서 온 원주민들이 알록달록한 털옷 판매. 


광장으로 가는 길은 온통 장사판이다.


소칼로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건물들에는 이미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경축하는 커다란 장식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광장은 이미 노란 파도가 물결치고 있었다. 시민들 개인적으로 찾아오기도 하고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모인 사람도 있고 지지단체의 사람들도 그룹을 이루고 있다. 


'국립 궁전'이라고 부르는 정부 청사 앞에 이미 마련된 커다란 단상. 7년 전, 같은 광장에서 필자는 71년간의 일당 독재를 종식시키며 혜성처럼 등장한 현 비센테 폭스 대통령의 취임식을 지켜보며 신기해했었다. 커다랗게 열린 공공 광장에서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직접 구경(?)한다는 것 자체가. 2년전 필자는 그 폭스 대통령을 대통령 관저에서 다시 만나뵈었다. 인연!. 폭스 대통령은 대선 이전부터 기나긴 레임 덕 기간을 보내고 있다. 혼란스런 정국으로 인해 얼마전 열린 APEC도 참석하지 못했다.  


자주 빛 휘장이 드리워지고 그 가운데 방울뱀을 문 독수리가 선인장 위에 앉아 있는 멕시코 국가 문장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이 문장은 이미 750여 년 전 고대 메시카인들이 오늘날 소칼로 주변에 정착하게 된 신의 예언이었다.

 

 

    엘 우니베르살 신문에 실린 오브라도르 취임 사진.

 

오후 5시경. 하늘은 먹구름이 짙게 끼어 있어 어둑어둑하다. 곧 소나기라도 내릴 듯 하다. 수십만 명의 인파 속에서 추위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곧 우레와 같은 함성 속에 로페스 오브라도르의 등장.

 

 

    오브라도르가 그려진 가방 


그는 현재 여당인 PAN(국민행동당)의 펠리페 칼데론 대통령 당선자의 당선이 조직적인 사기극이라고 하며 그의 당선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라는 의미로 오늘 취임식을 하는 것이다.


야당 후보의 대통령 취임식을 순조롭게 열게된 데는 멕시코시티의 시장 역시 같은 PRD라는데 이유가 있다.


대통령 현장을 몸에 걸친 로페스 오브라도르는 이날 연설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멕시코 헌법을 완수하고 합법적 대통령의 임무를 애국적으로 수행할 것을 약속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또 "멕시코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자산과 국가 주권을 수호할 것이며, 국민 행복을 증진시킬 것임을 다짐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갑자기 찾아온 한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칼로 광장에 운집한 수십만 명의 지지자들은 민주혁명당의 상징색인 노란 깃발을 흔들며 "오브라도르 대통령"을 외쳤다. 축제라도 되는 양 광장을 울리는 함성 사이로 귀에 익은 80년대 운동가 노랫소리. 불량한 차림새의 히피도 펑크도 모두 모였다.

 

 

   멀리 치아파스 주에서 올라온 고산마야 부족의 전통옷차림 아낙네들 


하지만 이날의 취임식과 그의 정부 방침은 법적인 효력은 없다. 로페스 오브라도르는 자신의 “합법적 정부”가 멕시코 정치판에서 평형을 이룰 것을 주장하며 앞으로 “순회 대통령”으로서 전국 순방에 나설 것을 약속했다.

 

  대선시 오브라도르의 캐리캐쳐. 친근하고 코믹하긴한데...다람쥐도 아니고. 앞니가 좀 ^^;;


그리고 다음 주 즉 12월 1일의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PRD 당과 합법적 대통령인 된 로페스 오브라도르는 지속적으로 칼데론 새 대통령과 정부 방침에 반대 운동을 펼쳐나갈 것을 다짐했다. 

 

로페스 오브라도르의 '정부'는 이미 자체 내각을 구성한 가운데 세금을 징수하지 않고 입법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기본 방침과 함께 멕시코 빈민층을 위한 제도개혁과 부패척결 등을 약속하며 정부 방침 20가지를 발표하였다.


그가 내세운 정부 방침에는 공공제도 혁신, 국민의 알권리 보호 및 언론기관 개방,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설치 반대, 부정행위 고발 및 각료. 법관 감시, 와하까 주 교사파업 장기화의 원인인 율리세스 루이스 주지사 퇴진 요구 등이 포함되었다.

  

    

   원주민 발음을 그대로 쓴 플랭킷. 웃읍시다. AMLO(오브라도르의 약자)를 대통령으로 라는 구호.


한 나라에 두 명의 대통령이 있다는 것이 불안하지 않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과달루페 라는 아주머니는 "선거 부정이 있었다. 다시 선거를 해야 한다. 우리들은 펠리페 칼데론을 인정할 수 없다"라고 했다. 옆에서 한마디씩 거든다. "칼데론은 대통령의자(대통령 직)를 훔친 것이다.  물러나야 한다." "이 나라는 지금 몇몇 부유한 사람들에게만 유리한 나라다. 가난한 사람들도 함께 잘 살아야 한다." 등 정치적인 발언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경찰들의 시위대 탄압 장면의 사진과 권총들을 몸에다 덕지덕지 붙인 젊은이들.

 


아마 이날 이 자리에 참석한 시민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오브라도르 후보가 조직적인 개표 부정으로 대통령 직을 박탈당한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이미 전직 대통령의 부정축재와 선거 부정에 관한 커넥션이라는 최신의 대안매체 다큐멘터리가 시중에 나돌고 있었다.

 

 

 20일 소칼로에서 오브라도 대통령을 이란 구호가 적힌 플랭카드를 들고. 


글쎄. 이미 선거는 끝났고 겨우 20만표 차이라는 그 결과에 불복하는 야당과 지지자들의 힘이 이렇게 현실로 드러날 줄은 짐작이나 했을 런지. 선거 부정 의문을 해소시키지 못하고 투표함을 소각해버린 새 정부나 새 대통령을 사기꾼으로 몰아붙이며 대안 대통령을 앞세우는 지지자들과 이번 선거로 제 1 야당이 된 PRD 후보의 취임식 해프닝은 추위로 얼어붙은 멕시코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러나 PRD 진영 내부에서도 당 창설자인 꽈우떼목 까르데나스를 비롯한 좌파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한 상당수 당원들은 로페스 오브라도르의 급진 노선에 제동을 걸고 있으며 정상적 의회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는 볼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스페인 일간지 엘 빠이스는 로페스 오브라도르의 '합법적 대통령' 취임식과 관련해 “이는 정치적인 유령광대극이다. 멕시코 사회와 평화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가장 인기있던 노란 티 셔츠. "합법적 대통령 오브라도르"라고 써 있다.


100년 전 멕시코 역사의 흐름을 바꾼 혁명정신을 기리기 위한 기념일인 20일은  와하까 시에서는 교사파업사태로 인한 시위를 비롯하여 치아파스 주나 미초아깐 주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시위들로 빛바랜 기념일이 되었다. 

 

하지만 이날 소칼로에 구름처럼 몰려들어 "오브라도르 대통령"을 외쳤던 지지자들과 야당 후보의 대통령 취임식이 결코 심심한 하나의 해프닝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새 대통령 당선자는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선 이번 정국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지가 그 어떤 문제보다 우선일 것이다. 앞으로 멕시코 새 정부의 갈 길은 첩첩산중으로 들어갈 듯하다.

 

 

   혁명군 복장의 지지자들.


 

  치아파스 원주민 아낙들.

 

 

    인산인해의 소칼로

 

 

 

 


 

 


 

                        소칼로에서 대통령을 외치는 지지자들의 함성이 담긴 동영상

 

 

 다음 글은 영혼에게 제사도 지내고 축제도 여는 멕시코 "죽은자의 날"에 대한 얘깁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