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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청소년들, 멕시코와 쿠바 에네껜 후손들 만나다.

미키라티나 2007. 9. 3. 14:20

잠깐! 이 글을 읽기전 단어 테스트 좀 할까요? "새터민" , "에네껜"

넵. 그동안 언론을 통해 참 많이도 소개되었던 용어들입니다.

 

"새터민"은 최근 대한민국에 정착한 북한출신 사람들을 칭하는 용어죠. "에네껜"은 멕시코에서 나는 질긴 섬유를 가진 용설란의 한 종류 입니다. 하지만 멕시코의 에네껜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인 구한말 있었던 우리네 역사의 한 부분입니다만 유일하게 단 한번으로 끝났던 100년전 멕시코 이민역사에 등장하는 한 많던 삶을 살았던 우리네 조상들을 불렀던 명칭입니다.

 

오늘은 새터민과 에네껜,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 두 용어가 합쳐진 얘기입니다.

 

메리다에서 펼쳐진 에네껜 후손들과 남북한 청소년들이 함께한 8.15 광복절 기념식 피날레에서 함께 아리랑을 불렀다.

 

지난 8월 초. 새터민과 대한민국 청소년으로 이루어진 16명의 학생들과 엄 홍길 산악인, KBS 라디오 팀과 TV 촬영팀, 취재기자 그리고 윤 인구 KBS 아나운서, 송 봉주, 고 한우 등 두 명의 가수로 이루어진 15명의 스탭들 해서 총 31명으로 이루어진 "KBS 제 2 기 남북청소년 역사 탐험대"가 멕시코를 찾아왔다.

 

이들은 약 보름간 멕시코와 쿠바에 살고 있는 에네껜 후손들과의 만남으로서 비록 얼굴도 언어도 다르지만 100년전 대한제국을 떠나 미지의 나라로 이민왔던 에네껜 조상들의 발자취를 함께 되새기는 뜻깊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겨우 보름. 하지만 함께 보낸 그 시간들 속에 탐험대 팀 모두는 말 할 나위도 없고 함께했던 멕시코와 쿠바 에네껜 후손들도 그 사이에 피어난 감정의 교류는 국경과 인종을 추월한 끈끈한 감동으로 오래오래 이어질 것이다.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 감동의 순간들이다.

 

1. 첫 방문지인 멕시코 시티에서;

 

   멕시코 시티에 도착해서 에네껜 후손들과 함께했던 태권도 훈련을 마치고.

 

멕시코 시티 대사관에서 원 종찬 대사님 주최 에네껜 후손들과 함께한 만찬에서 엄 홍길 대장님 답사

 

    에네껜 후손들과 함께 멕시코 시티의 심장부인 소칼로를 둘러보았다

 

학생 수 40만의 세상에서 가장 큰 대학인 멕시코 국립자치대학인 UNAM 대학본부 앞에서 

 

2. 이스따시와뜰 산을 오르다

 

멕시코 시티에서 동쪽에 있는 뿌에블라 시로 넘어가는 길에 만나는 이스따시와뜰. 누워있는 여인의 형상이다.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머리, 가슴, 다리 순으로  

 

멕시코시티에서 우기에 비가 많이 온 뒤의 맑은 날이나 건기일지라도 바람이 많이 불어 도시를 뒤덮고 있던 뿌연 공해를 말끔히 걷어간 날이면 어김없이 동쪽으로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활화산 뽀뽀까떼뻬뜰(연기나는 산, 해발 5452m)과 그의 연인이라고 하는 사화산 이스따시와뜰(잠자는 하얀 여인, 해발 5230m)이 나란히 하얗게 만년설을 덮어 쓴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우리나라의 산들과 마찬가지로 이 두 산 사이에는 멕시코 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할 만큼 비극적인 슬픈 전설이 전해진다. 이름처럼 이스따시와뜰은 긴 머리채를 늘어뜨리고 두 손을 모아 가슴에 얹고 발을 쭉 뻗고 누워 있는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애칭으로 뽀뽀라고 부르는 삼각뿔의 전형적인 활화산이 뿜어대는 연기는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애타게 부르는 듯 늘 이스따시와뜰로 향한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화산이 되어


   전설에 따르면 이스따시와뜰은 명망 있는 귀족의 딸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뽀뽀는 가진 것 없는 천민이라는 이유로 그녀의 아버지는 이 두 연인의 사이를 반대했다. 그래도 변함없는 둘을 보자 아버지는 마법사의 도움으로 이스따시와뜰을 영원히 잠들게 한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뽀뽀는 그녀 곁에서 분노와 슬픔으로 불을 뿜는 화산이 되었다고 한다.

 

둘은 아주 가까이 연결된 산으로 이른 아침마다 뽀뽀의 정열을 상징하는 연기가 늘 사랑하는 여인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매일 확인할 수 있다. 얘기야 어찌되었든 영원히 누워 잠자는 하얀 눈 아가씨의 모습으로 보이는 이스따시와뜰의 모습은 고대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언제 뽀뽀의 슬픔이 불기가 되어 터질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가 없다.

 

하지만 슬픔과 분을 삭이지 못하는 듯 뽀뽀는 가끔 분출해서 시민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1977년부터 시작된 분출은 1998년 4월과 8월 대폭발에 이어 2000년이 저물어 가던 12월 13일 뽀뽀의 분화구에서 분출된 수증기는 상공 5000m까지 올라가서 시민들을 긴장시키기도 했지만 다행이 폭발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뽀뽀는 입산이 금지되어 있고 이스따시와뜰은 보통 일주일 코스로 완주하는 등반 코스가 있다.

 

이번 탐험대는 짧은 일정으로 인하여 이스따시와뜰의 발치인 4200m 고지를 오르게 되었다.

 

 멕시코 시티는 해발 5000m 가 넘는 고산이자 활화산인 뽀뽀까떼뻬뜰과 이스따시와뜰(오른쪽)이 굽어보는 분지다.  

 

  이스따시와뜰의 영험한 모습. 해발 4200m 에 이르는 발치까지가 오늘의 목표점이다.

 

   해발 3000m가 넘으면 볼 수 있는 고산 풀 "빠하 브라보"

 

엄 홍길 대장님을 선두로 출발은 산뜻하게. 허나 이곳이 벌써 해발 3600 m. 숨쉬기가 버거운 상태다.

물론 8000m의 고봉들을 16개나 오르신 엄 대장님께는 식은죽 먹기지만. ^^

 

뒤로 입산이 금지된 활화산 뽀뽀까떼뻬뜰. 정상이 구름속에 있다

 

 앙상한 가지뿐인 고목들을 보니 지리산 정상이 생각났다

 

3시간을 걸은 후 해발 3900m 지점. 우기라 매일 오후 쏟아지는 비가 오늘따라 화창한 날씨로 이방인을 맞았다. 정말 운이 좋은 날!

 

지금까지는 몸 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쉬는 1 베이스. 여기서부터가 고난도. 이미 3명이 고산증으로 하산하는 사태가.

 

오르고 또 오르고. 정상이 빤히 보이는...길은 멀지 않은 듯하다만 한발짝 띄기가 아주 버겁다. 지친 표정의 윤 인구 아나운서.

 

걷다보면 눈을 확 끌어당기는 고산 꽃들이 활짝 웃으며 속삭인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결국 도착. 이스따시와뜰의 발치. 고도계가 해발 4194m를 나타낸다.

 

해냈다! 성공의 기쁨. 산은 오르라고 높이 솟은 듯 하다. 모두들 대단하다. 단 3시간만에 3600m에서 출발하여 4200m를 오르기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닌 것을. 정신력과 적응력의 승리!

 

3. 떼오띠와깐 태양신전에서 태양신의 기를 받고

 

멕시코 고대사의 정점에 있는 떼오띠와깐을 찾았다. 태양신전을 올랐으나 웬걸 정상에서 비를 맞다.      

  

내친 김에 달 신전도 올랐다. 이제 멕시코에서 오를 곳은 다 오른 듯. 

 

4. 에네껜 조상들의 발자취를 따라 쿠바로. 마딴사스로. 

 

쿠바에 도착해서. 호세 마르티 공항이다. 음. 짐 부치고 찾는 것도 일이다. 모두 32명이니.

 

쿠바 에네껜 후손들이 많이 살고 계신 마딴사스 주에 있는 바라데로에 도착. 바라데로는 카리브 휴양지로 유명하지만 탐험대에겐 에네껜 조상들의 흔적의 한 곳이다.

 

가장 먼저 만난 쿠바 에네껜 후손인 파뜨리시아 임 장. 후손 4세지만 부모님이 순수 한국인이라 얼굴은 우리와 똑 같다. 그녀는 쿠바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다. 아들 이름은 "원주". 할아버지 고향 이란다.

 

 바라데로 휴양지

 

 바다에 풍덩. 바다 건너 죽 가면 미국 마이애미.

 

5. "엘 볼로"의 한인 추모 기념비

 

 

지난 2005년 세워진 한국인 추모비 안내문 

 

추모비 앞에서

 

추모비에는 1921년 쿠바로 건너온 분들에 대한 추모사가 적혀있다.

 

멕시코에서 에네껜 노동에 지친 일부 한인들은 쿠바의 사탕수수가 호황이라는 소식을 듣고 쿠바로 이주해서 새 삶을 살 결심을 한다. 1921년 약 200여명의 한인들은 지긋지긋한 에네껜 농장을 떠나 쿠바에 도착했다. 하지만 호황을 이루던 쿠바의 사탕수수가 하루아침에 가격이 폭락하는 사태를 맞고. 한인들은 그들의 운명을 저주하면서 또 다시 에네껜 노동자로 나서게 되었다.

 

그들은 마딴사스 주의 "엘 볼로"라는 곳에 공동체 마을을 이루고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헤로니모 임과 그의 아내 크리스티나 장씨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엘 볼로에 정착한 한인들은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와 싸우며 하루종일 에네껜을 자른 후 마을에 돌아와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어두운 등불 아래에서 새로운 세대인 아이들에게 고국의 풍습과 전통, 예절, 음식, 문화 등 그들이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고국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작은 학교도 세워서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한인 1세대 2세대가 있어 아직은 한국말을 할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었다고 빠뜨리시아 임은 아버지 헤로니모 임씨가 해준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그의 이야기 중에 이들은 입에 풀칠할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1인당 1숫가락씩 쌀을 덜어내어 독립 자금을 만들어 고국에 보냈다고 한다.  

 

"엘 볼로" 마을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한인들은 1950년대에는 거의 이곳을 떠나 아바나나 마딴사스로 이주해서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다. 지금의 엘 볼로 마을은 여전히 남아 있는 당시 가옥들에 쿠바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곳곳에 당시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엘 볼로" 마을. 멕시코에서 쿠바로 건너온 에네껜 조상들이 정착했던 곳이다. 사탕수수 노동일을 하러 왔지만 결국 다시 에네껜 일을 해야했던 그들은 이곳에서 공동 생활을 하다 마을을 떠났다. 이 집은 빠뜨리시아의 아버지인 헤로니모 임(임 은조)이 태어난 곳이다.

 

빠뜨리시아는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을 더듬으며 그녀의 눈은 눈물로 글썽였다.

 

헤로니모 임의 집 과 붙어 있는 이 건물은 당시 학교였다고 한다.

 

헤로님모 임 집과 가까이 있는 이곳은  당시 교회 건물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당시에 한인들이 이곳에 살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공동으로 사용하던 우물. 이제는 못쓰는 버려진 우물이다. 두레박이 돌아가던 흔적이 있다.

 

바라데로에서의 밤은 깊어가고 탐험대는 작은 무대를 빌려 그동안 틈틈히 갈고 닦은 실력으로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 앞에서 공연을 했다.

 

6. "보까 데 까마리오까" 마을의 에네껜 농장

 

에네껜을 비롯한 용설란들은 대부분 25년이 되면 꽃대가 길게 자라 나온다. 그 꽃대 끝에 꽃이지면 그 자리에 작은 용설란이 자라서 떨어진다. 그렇게 자손을 퍼뜨리고 나면 용설란의 생은 끝난다. 

 

한 많은 에네껜 밭. 하지만 멀리 보이는 바다는 평화롭기 그지없다.

 

보까 데 까마리오까라는 마을에 위치한 에네껜 공장. 쿠바에서는 한때 사양 산업이었던 에네껜 제조업이 최근 다시 부활하고 있다. 나일론 원료가 비싸지고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자 다시 에네껜 섬유를 생산하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휴가철이라고 한다. 멈춘 작업장에는 몇명의 노동자만이 일 하고 있다.

 

말려서 뽑은 에네껜 섬유를 길게 이어서 일일이 사람손으로 새끼줄 꼬듯 꼬는 작업 중이다.

  

이렇게 꼬은 줄을 다시 꼬으면 더 강한 밧줄이 된다.

 

에네껜 잎을 말리면 이렇게 섬유질이 나온다. 이 섬유는 잘라낸 에네껜 잎을 묶는 끈으로 사용한다.

 

폐 공장이 된 시설들. 시설을 보면 얼마나 오래전에 에네껜 산업이 사양산업이 되었는지 짐작이 간다.

 

쿠바 농촌에서 볼 수 있는 마차

 

7. 현재 쿠바 한인회를 만드신 헤로니모 임의 댁 방문

 

고 헤로니모 임 김씨는 현재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약 700명에 이르는 에네껜 후손 한인들을 파악하여 결속시키는 데 평생을 바치신 분이다. 2006년 1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쿠바 한인회 2006년 계획을 세울만큼 한인회에 대한 애정이 특별했다고 한다. 현재 쿠바 한인회 일은 그 딸인 빠뜨리시아 임이 이어가고 있다. 한국을 사랑하는 그녀의 쿠바 남편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아버지가 못다하고 가신 일을 해나가는 장한 딸이다!  

  

헤로니모 임의 미망인인 크리스티나 장과 빠뜨리시아 임

  

헤로니모 임의 신분증. 쿠바 라디오 기자증 이다. 마딴사스지국의 부국장. 한국인의 얼굴.

 

1948년 5월에 쓴 쿠바 한국인에 대한 기사.

 

2005년 에네껜 이민 100주년을 맞아 헤로니모 임께 한국에서 수여한 표창장

  

한국에서 헤로니모 임의 부친께 수여한 훈장

 

헤로니모 임은 전 쿠바 당의장인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혁명을 함께 한 동지다. 혁명이후 그는 식량산업부 차관을 지냈다. 그에게 수여된 쿠바 훈장들.

 

현재 고 헤로니모 임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

 

해마다 8월 초, 말레꼰에서 열흘동안 열리는 아바나 카니발에 참여하러 가는 아바나 시민들.

 

밤마다 탐험대들은 그날의 일정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8. 아바나 역사 탐방

 

아바나의 명물 코코택시

 

아바나 구 시가지에 있는 유명한 바 "보데기또 델 메디오"의 악사의 악기를 두드려보며 너무 즐거워하는 한 광석 학생

 

헤밍웨이의 집 박물관인 Finca de la Vigia

 

헤밍웨이가 사랑했던 그리고 헤밍웨이를 사랑했던 마을 꼬히마르. 그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되었던 Cojimar 마을에 세워진 동상. 마을사람들이 십시일반 모아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쿠바는 어딜가나 시가 냄새와 함께 향긋한 커피 냄새가 난다. 쿠바인들이 마시는 에스프레소 커피는 정말 달콤하다.

 

쿠바의 상징인 살아있는 전설인 카스트로와 쿠바인이 아니면서 가장 쿠바적인 체 게바라.

 

코코택시에 탄 탐험대원들. 윤 소천, 강 철용, 한 광석 

 

 혁명광장에서도 한 컷.

  

쿠바 일정을 함께 해주셨던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사람같은 펠리페 아저씨, 묵묵히 맡은일에 최선을 다하던 전 옥별 학생, 최 석구 PD님, 수줍음이 많던 강 철용 학생.

 

9. 에네껜 이민자들의 첫 정착지인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시에서 남북한 청소년들과 에네껜 후손들이 함께 펼친 감동적인 8.15 광복절 기념식

 

 19세기 메리다 주변의 유까딴 북부 지방에는 광대한 에네껜 농원이 개척되어 마야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대 규모의 토지를 점유한 지주들에 의해 노예처럼 착취당하고 있었다. 에네껜에서 뽑은 섬유를 꼬아 만든 노끈은 아주 질기고 튼튼하여 1950년대 나일론 노끈이 등장하기 전까지 전 세계의 선박용 밧줄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마야인들과 백인 지배계급 간에 까스따스 전쟁 즉 "계급전쟁"이 있었고 그리고 멕시코 혁명이 전국을 휩쓸며 에네껜농장의 노동력이 부족하자 외국노동자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에네껜 밧줄의 수요가 급증하자 1905년 일본의 농간으로 대한제국에서 노동자가 모집되었고 1018명의 한인들이 영국상선 "일 포드" 함을 타고 당시 제물포 항(현재 인천)을 출발하여 태평양을 건너 그해 5월 멕시코 살리나스 항구에 도착했다. 살리나스 항구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대륙을 건너 다시 배를 탄 끝에 도착한 곳이 메리다시의 항구 쁘로그래소(Progreso).

 

4년간 에네껜 노동자로 계약을 맺고 큰 돈을 벌어 돌아가리라던 그들은 한번도 듣도보도 못한 가시투성이의 에네껜 자르는 일에 투입되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 소우리와 같은 주거 환경(마야인들은 지금도 흙벽에 야자나무 지붕 집 그리고 흙바닥에 뱀과 곤충으로부터 안전한 그물 침대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온돌방에서 이불을 덮고 살던 당시 한인들 눈에는 그들의 생활이 마치 동물들이나 그렇게 사는 것이라 비춰졌을 것이다), 입에 맞지 않는 옥수수 전병 등의 생소한 식생활 등이 모두 문화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루하루 적응하며 계약이 끝날 날만 기다리던 그들에게 청천날벼락은 한일 합방 소식. 졸지에 나라를 잃어버리고 오갈데 없는 미아가 된 그들은 이를 악물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등 억척같이 살았지만 신산한 역사 속에서 고국은 이들을 잊어버리고 만다.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멕시코에서 그리고 쿠바에서 한많은 인생을 마친 조상들은 그래도 고국 이야기를 그들 후손들에게 들려주었다.

 

그 후손들은 지금도 아버지와 엄마, 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부모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자신들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다. 사실 멕시코나 쿠바라는 나라는 백인, 원주민, 흑인 등 온갖 혈통으로 혼혈이 매우 흔한 곳으로 혼혈이 이 나라들의 정체성을 이루는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어쩔 수 없이 혼혈을 했지만 100년이 지나면서도 그 뿌리를 잊지 않고자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마야 사람들은 동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기도 해서 혼혈이 되면 한국적인 모습이 거의 사라지게 된다.  

 

그 후손들은 아직도 한국의 성씨를 가지고 있어 가끔 이씨, 박씨, 고씨 등의 성을 가진 멕시코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며 조상들이 쓰던 언어와 글은 잊어버렸지만 밥, 김치, 고추장, 장조림, 국수 등 즐겨 먹던 음식 이름은 아직도 기억하고 그 요리를 해 먹는다. 특히 지금의 우리들에겐 큰 의미가 없는 60세 생일 즉 "환갑" 이라는 단어는 대부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만큼 환갑잔치는 조상들이 꼭 지켰던 우리네 풍습이었던 것.

 

대원들이 며칠동안 민박했던 메리다 한인한글학교. 에네껜 후손들이 한글을 열심히 배우는 그들의 한글학교다. 탐험대 학생들 대장인 왕 의젓 김 화영 학생, 책임감 무지 강했던 김 우성 학생.

 

8월 15일 62회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메리다 시내의 "아메리카 공원". 원 종찬 대사님 곁에 화려한 유까딴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 여자분이 8월에 취임한 유까딴 주지사인 이본느 오르테가.

 

식장을 가득메운 에네껜 후손들과 메리다 시민들 

 

에네껜 후손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한국인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인기만발이었던 한국의 가수 두분.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의 송 봉주씨와 "암연"의 고 한우씨 

 

에네껜 후손들이 준비한 부채춤. 완벽했다.

 

10. 새벽의 에네껜 농장에서의 노동

 

새벽에 길을 나섰던 에네껜 농장 체험

 

에네껜 밭에서 잎을 자르는 대원들. 한 낯이면 40도를 넘나드는 불볕 더위라 오전에만 일은 한다.

 

한서린 에네껜. 멕시코에서의 에네껜은 이제 그물침대인 해먹, 모자, 돗자리, 가방 등 민예품을 만드는 재료로 쓰이고 있다. 일부 쿠바에 수출되기도 한다.

  

에네껜 잎은 40개씩 한다발로 묶여 이곳 농장으로 가지고 와서 섬유를 만든다. 

 

수북히 쌓인 에네껜 섬유 다발.

 

11.신 7대 세계 경이 치첸 잇짜 유적지 관리 소장님 라몬 리

 

필자와 함께한 이분은 라몬 리 레혼씨로 올해 7월 새 7대 세계경이에 들어간 마야의 치첸 잇짜 유적지를 관리하는 소장님이시다. 에네껜 3세로 아버지가 한국인으로 혼혈.

 

치첸 잇짜의 상징인 까스띠요(성채) 피라미드 앞에서. 얼마전 까지도 계단으로 피라미드 정상에 올랐으나 올해 새 7대 세계 경이에 선정된 후 하루 1만명으로 방문객이 급증하자 피라미드 정상에 오르는 것을 전면 금지시켰다.

 

가수 송 봉주씨와 이번 탐험이 끝나면 군대간다는 윤 소천 학생. 필자의 20년 후배 ^^;; 

 

치첸 잇짜 유적지 안. 2년전부터 주변의 민예품 상인 유적지 안을 점거하기 시작했다. 예전의 고즈녁함은 사라지고 번잡한 시장판 같아져 사실 무척 아쉽다.

 

12. 한인 이민 추모 박물관과 이민 100주년 기념탑

 

에네껜 이민 한인 추모 박물관. 올해 5월에 문을 연 박물관으로 멕시코 에네껜 이민사의 매우 중요한 문서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입장료 20 뻬소. 이분은 박물관장님으로 하비에르 꼬로나 씨. 꼬로나라는 성씨는 "고" 씨가 멕시코 식으로 변형되어 불려진 것.

 

멕시코 한인 이민 100 주년 기념탑은 지난 2005년에 메리다에서 프로그래소 항구로 가는 도로에 세워졌다. 2005년 메리다에 한국의 지원으로 한-멕 우정의 병원도 세워 메리다 시민과 에네껜 후손들에게 의료 도움을 주고 있다.

  

그렇게 그리워하며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 꿈꾸다 이국땅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에네껜 조상들을 추모하는 엄 홍길 대장님.

 

멕시코 한인 이민 100 주년 기념탑  

 

그리고....짧은 만남 긴 인연~ 

 

60여년전, 한 형제였던 나라는 외세에 의해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두 나라로 나뉘었다. 같은 피, 같은 언어, 같은 글, 같은 음식, 같은 옷, 같은 풍습을 가졌던 한 나라는 억지로 두 나라가 되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수많은 아이들이 고아가 되고 부모와 형제들이 생이별을 한 채 지금까지 소식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남의 일이 아닌게 필자의 아버지도 함경남도 흥남이 고향이시다.

 

이번 탐험대에 함께 했던 새터민 학생들 대부분이 함경도 말투를 쓰는 것을 들었을때 왈칵 눈물이 나려했던 것도 아마 아버지의 고향이래서 일거다. 일정 내내 탐험대원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특히 새터민 학생들의 이야기들은 100년전 에네껜 조상들이 걸었던 그 길과 어쩜 그리도 닮은꼴인지. 

 

그들이 이자리에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을까.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두려움을 떨치고 온 몸을 내던져야만 했던 그 상황. 다르다면 아직 세상을 모를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그 모진 경험들. 그들의 인생 한 순간순간이 모두 한편의 소설. 결코 무심코 들어넘길 수가 없었다.  

 

새터민 사람들 이야기는 언론에 가끔 비춰지는 정도로 정작 대한민국에서의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먼 나라의 난민처럼 느껴졌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가까이 쿠바 난민들이 뜨기만 하면 냉장고든 튜브등 바다에 띄워 미국땅을 밟으러 가는 기사에 흥미가 있었던 것처럼. 그저 멀고도 먼 남의 이야기로만 알았다.

 

그들이 우리와 똑 같은 말을 쓰고 똑 같은 글자를 쓰고 같은 성씨를 가지고 있는데도 나는 왜 그들이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 느꼈을까? 우리 아버지와 같은 고향 사람들인데. 어쩌면 우리 아버지와 먼 친척일수도 있을텐데. 그 소박한 미소 뒤에 가려졌던 무거운 슬픔을 알아가는 부담감.

 

모든 일정을 다 마치고 돌아가던 날 결국 눈물이 났다. 아버지의 고향에서 온 아이들인데 왜 그들을 못알아 봤을까 하는 아니 왜 그들을 그렇게 외면했었을까 하는 회한같은 것이 울컥 솟구쳤던.

 

이번 남북한 청소년 탐험대가 멕시코와 쿠바의 에네껜 후손과의 만남을 계기로 오랫동안 떨어져 두드러지게 이질적이고 어색하기만 한 남한과 북한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조그마한 진동으로 시작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맺는다.

 

 보름간의 멕시코와 쿠바 대 장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는 탐험대를 배웅나온 에네껜 후손 학생들. 며칠간 함께 한 시간들이 못내 아쉬워 눈물을 글썽이던 그 눈동자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멕시코의 하늘 아래서 울려퍼진 아리랑


 

탐험대와 멕시코, 쿠바 에네껜 후손들의 이야기는 이번 주내내  즉 오늘 9월 3일부터 금요일인 7일까지 KBS 2 TV <세상의 아침>에 방송되며, KBS 제 1 라디오에서는 3일, 4일 이틀간 아침 11시 10분부터 방송됩니다. 대한민국과 새터민 그리고 멕시코와 쿠바의 에네껜 학생들이 함께한 감동의 현장을 꼭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