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문명

멕시코의 유래, 아스떼까 문명의 탄생에서 멸망까지

미키라티나 2007. 2. 28. 03:48

   멕시코의 유래

 

 

정설처럼 여겨지는 빙하기 이후의 아시아에서 고대아메리카로의 이주 경로

 

   멕시코라는 나라의 이름은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스페인에 의해 멸망한 메시까Mexica라는 고대문명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스페인식민지시대 사람들은 메시까라는 이름보다 그들이 떠나온 전설의 땅 아스뜰란에서 유래한 아스떼까라 불렀다.  

 

만화처럼 표현한 아스떼까 연대기 첫장...아스뜰란 이라는 섬에서 배를 타고 나오는 조상들. 

 

연대기 중간...유랑길을 발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사람들 머리 위에 그려진 그림은 그 사람들의 이름이다. 조상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수 없으나 말한다는 의미로 말풍선을 그려놨다.

 

연대기 중간...200 여년의 유랑 끝에 지금의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기록. 메뚜기가 그려진 언덕은 지금 멕시코시티의 차뿔떼뻭(메뚜기 언덕) 공원이 있는 곳이다.

 

연대기 끝...사각형 속의 그림은 연도를 나타낸다.

 

   메시까 혹은 아스떼까 문명은 엄격한 도덕과 교육을 통해 잘 정비된 사회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세련된 문화를 갖춘 도시 한복판에서 전쟁과 태양신을 위한 끔찍한 인신공양 의식이 벌어졌었다. 사회는 평민과 귀족으로 크게 양분되었고 평민층에는 상인과 장인이 그리고 최하층 노예가 있었으며 희생제물인 전쟁포로는 별개의 층이었다.   

 

 

  무시무시한 해골 조각

 

   아스떼까보다 앞섰던 똘떼까 문명에서 이미 떼오띠아깐에서부터 유래했던 께찰꼬아뜰(깃털 뱀)이 흑요석의 거울에서 유래한 떼스까뜰리뽀까(연기 나는 거울)라는 전쟁 신에게 쫓겨났었다. 신화에 따르면 떼스까뜰리뽀까가 께찰꼬아뜰에게 뿔께를 마시게 하고 그가 취하여 이성을 잃고 친누이와 근친상간을 범하게 하였다. 이를 몹시 부끄러워한 께찰꼬아뜰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남부 유까딴으로 가서 치첸 잇짜를 세웠다.


    께찰꼬아뜰은 중앙고원의 문명들에서 창조주로 도덕과 예술, 과학의 지도자이며 평화로운 신으로 숭배되었다. 아스떼까의 신화에서도 께찰꼬아뜰은 최초로 옥수수알갱이를 발견한 신이자 인간과 농업, 사회의 창조주이다. 그는 인간들에게 옥수수경작법과 건축, 노래, 도구와 공예기술로 채광, 금은세공, 비취연마, 깃털세공, 조각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전쟁의 신인 떼스까뜰리뽀까는 이후 아스떼까의 신 위찔로뽀츠뜰리로서 주신이자 수호신으로 숭배 받는다. 떼스까뜰리뽀까는 삶과 죽음을 관장하고 전사의 보호자라는 다양한 얼굴을 가진 신이다. 그 이름은 연기 나는 거울이라는 뜻으로 사람의 속을 들여다본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떠오르는 태양처럼 그가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전사의 피가 필요하였다. 이런 이유로 똘떼까와 아스떼까에서는 이들 신들에게 산 사람의 심장을 바치게 되었다.

 

  똘떼까의 착-몰(희생자의 심장을 놓던 제단)

 

   께찰꼬아뜰의 부족인 똘떼까 문명은 12세기 중엽의 중미 모든 문화의 집합체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똘떼까 문화는 추방된 신 께찰꼬아뜰이 만든 것으로 그 뒤를 잇는 여러 문명들이 돌떼까라는 단어 자체를 예술가와 동의어로 여겼을 만큼 귀중한 유산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께찰꼬아뜰은 똘떼까 문화유산을 계승하고 그 뒤를 잇고자 갈망했던 모든 고대문명들의 문화 아이콘이었다.

  

  똘떼까의 수도 뚤라...주신전과 열주

 

   뚤라의 주신전 위에 남은 네개의 기둥(전사의 모습이다)

 

   아스떼까는 전쟁과 공물, 인신공양과 같은 잔혹한 수단을 통해 멕시코 중앙고원에 군사권을 확대하면서 권력에 덧붙일 도덕적 정당화를 위하여 똘떼까의 문화유산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두 적대적인 신 즉, 창조와 문화 그리고 평화의 신 께찰꼬아뜰과 전쟁과 정복의 신 위찔로뽀츠뜰리는 아스떼까의 도덕과 예술의 정체성을 이루게 된다. 대 제국 아스떼까는 지금의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까지 위찔로뽀츠뜰리의 신전을 세우고 전쟁과 인신공양의 원칙을 확립하였다.

 

  해골모양의 조각으로 장식한 제단 쫌빤뜰리

 

   피의 역사


    위찔로뽀츠뜰리는 순수하게 아스떼까에 기원을 둔 단 하나의 신으로 전쟁의 신이다. 그 이름은 왼쪽(또는 남쪽 아스떼까에서 왼쪽은 남, 오른쪽은 북)에 있는 푸른 벌새라는 뜻이다. 그는 아스떼까 주신으로 매일 서쪽으로 들어가 밤의 별들을 격퇴한 뒤 지칠 때마다 전사들의 영혼의 도움으로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젊은 신이다.


   그의 탄생 설화는 피로 범벅이 된 전쟁으로 시작된다. 뱀의 얼굴에 뱀의 치마를 입고 해골과 잘린 손을 장신구로 달고 있는 기괴하고 무서운 형상을 한 꼬아뜰리꾸에(뱀 여인)는 대지와 죽음의 여신이다.

 

    무서운 형상의 대지의 여신  꼬아뜰리꾸에

 

   어느 날 그녀는 꼬아떼뻭(뱀 언덕)의 신전을 청소하고 있었다. 그때 바닥에 초록색의 아름다운 깃털이 떨어진 것이 눈에 띄자 이를 주워 허리춤에 간직했다. 이후 대지의 여신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이미 400명의 아들들인 센초위츠나와(남쪽사람들)과 꼬욜사우끼(황금방울)라는 딸이 있었다.


    딸은 오빠들에게 달려가 여신의 임신 사실을 알렸다. 이에 오빠들은 태아를 죽이기로 하고 여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여신이 두려움에 떨자 그녀의 배속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라며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400명의 형제들이 어머니 여신을 죽이려 다가오던 순간, 갑자기 손에 불의 뱀을 들고 완벽한 전사의 모습을 한 전쟁의 신 위칠로뽀츠뜰리가 태어났다.


   그는 먼저 동태를 살피러온 누이를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뜨렸다. 그녀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녀의 목을 허공에 던지니 달이 되었다. 이어서 400명의 형제들을 모두 물리치고 창공에 흩어버리니 별이 되었다. 이렇게 위칠로뽀츠뜰리는 태양이 되고 누이는 달, 400명의 아들들은 별이 되었다.


      따라서 태양신 즉 위찔로뽀치뜰리는 매일 밤 서쪽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 달과 400개의 별들과 전쟁을 치르고 아침에 동쪽 하늘에서 지난밤의 상처로 피를 흘리며 즉,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며 떠오른다. 이를 지켜보던 아스떼까 사람들은 매일 아침마다 태양이 다시 떠오르기를 고대하며 마음을 졸여야 했다. 그들은 주신인 위칠로뽀츠뜰리의 상처를 치료하고 그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산 인간의 심장을 바치게 되었다.

 

   카리브 해적들의 깃발 모티브로 쓰였던 쫌빤뜰리

 

  쫌빤뜰리

 

    사실 잔인한 신화지만 그 속에는 타지에서 온 유랑민 아스떼까 부족들이 어떻게 중앙고원의 수많은 토착부족들과의 전쟁을 통해 패권을 쥐게 되는지에 대한 역사가 들어있다. 태양신과 400개 별들과의 전쟁은 고대 아스떼까가 차례로 정복한 부족들을 표현한 것이다.

 

 아스떼까 시대의 중앙고원. 떼스꼬꼬 호수 주변으로 여러 부족들이 있었다.

 

   멕시코시티의 아스떼까 유적지인 뗌쁠로 마요르에 있는 커다란 꼬욜사우끼 여신 원반에는 사지가 뱀에 묶여 절단되고 목이 잘린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신화를 통해서 고대 사람들은 유난히 태양에 집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집트부터 잉카까지.       

  

 떼노츠띠뜰란의 주신전 유적지. 오늘날 뗌쁠로 마요르 라 불린다.

 

  달의 여신 꼬욜사우끼 원반. 단 하나의 커다란 돌판이다. 

 

  전설처럼 온 몸이 산산조각난 꼬욜사우끼.

 

   꼬욜사우끼의 머리...달이 되었다.

 

   만화 같은 아스떼까 연대기


   12세기경, 전설의 도시 아스뜰란을 떠나 북미의 애리조나 주와 멕시코의 치와와 주를 거쳐 내려온 호전적인 메시까 부족은 200여 년의 긴 유랑 끝에 멕시코 중앙고원의 계곡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은 이미 이곳에 정착한 토착민들과 전쟁을 하며 수호신 위찔로뽀츠뜰리가 내린 예언의 새로운 정착지를 찾고 있었다.

 

  아스떼까 시대의 멕시코시티. 떼스꼬꼬 호수와 두개의 만년설 봉우리.


    신의 예언은 뱀을 문 독수리가 바위에 뿌리를 내린 선인장 위에 앉아 있는 곳에 새 나라를 세우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1325년 어느 날, 메시까 부족은 떼스꼬꼬 호수 속의 작은 섬에서 예언의 장소를 발견하였다. 이곳이 바로 오늘날 멕시코시티의 심장 소깔로 다. 멕시코의 탄생설화는 현재 멕시코국기의 문장에 그려져 있다. 소깔로에 가면 뱀을 문 독수리가 선인장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는 메시까 인들의 조형물이 있다.

 

 

  아스떼까 전설 속 예언의 땅을 발견한 순간의 조형물.


  전설에 따르면...어느 날 밤, 위칠로뽀츠뜰리가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을 하였다. “전에 내가 한번도 한 적이 없는 이 이야기가 사실이 된다면 너는 아주 행복하게 될 것이다. 내가 나의 조카 꼬삘리를 네게 보내 희생을 하고 그의 심장을 꺼내 갈대숲에 던졌던 것을 기억하는가. 심장은 돌 위에 떨어져서 커다랗고 아름다운 노빨이 자라나고, 그 위에서 독수리가 둥지를 짓고 작은 새 가슴을 먹었다. 너는 나의 조카 꼬삘리의 심장에서 자라난 노빨을 찾으라. 그리고 그곳의 이름은 떼노츠띠뜰란이라 하여라”.”


   전쟁과 태양의 신 위찔로뽀츠뜰리를 받들던 용맹한 메시까 사람들은 호수 안에 있는데다 척박하고 뱀들만 득실거리는 변변치 못한 이 섬에 터를 잡았다. 그들은 1325년에서 1345년 사이에 호수에 갈대와 부식토를 번갈아 쌓아올린 인공 섬 치남빠(갈대울타리)를 만들고 그 위에 수도 떼노츠띠뜰란을 세운다.

 

   수상도시 떼노츠띠뜰란 상상화

 

   이는 태양과 달의 아들인 메시뜰리(위찔로뽀치뜰리)가 있는 신성한 선인장이라는 뜻이다. 메시까 사람들의 언어인 나와뜰 어로 메시뜰리는 달 또는 달의 여신이고 시뜰리는 중심이라는 뜻으로 오늘날 멕시코는 달 호수의 중심 또는 메시뜰리의 장소라는 뜻이 된다.


   이후 메시까는 주변의 다른 부족들과 전쟁 또는 연합을 통해서 세력을 확장하여 영토를 넓혀 나갔다. 200년 사이에 멕시코시티 근처는 물론이고 태평양연안에서 멕시코 만 그리고 남부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제국을 이루며 멕시코 중앙고원의 문명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수상도시 떼노츠띠뜰란


    신대륙의 여러 문명들은 특이하게도 큰 강이 없는 곳에서 태동했다. 그러나 생산성이 높은 농업은 문명발달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아스떼까 제국은 떼스꼬꼬의 얕은 호수 바닥에 각 75m 길이에 10m 또는 20m 넓이의 직사각형으로 촘촘히 말뚝을 박고 나무로 그 둘레를 둘러싼 다음 그 안에 진흙과 수초를 쌓아 만든 인공 섬 치남빠 위에 수도를 세웠다. 신전을 둘러싸고 작은 섬 들이 모여 커다란 수상도시 즉 치남빠스가 되었다. 초기에는 식량을 생산하는 농경지였으나 이후 고정된 견고한 땅이 되자 신전과 주거지로 건물을 지었다.

 

  소깔로 지하철 역에 전시된 떼노츠띠뜰란 조형물. 맨 뒤 가운데 신전 두개는 주신전으로

  지금의 뗌쁠로 마요르 이다.


   농경지는 습지에 도랑을 파내고 그 흙을 양쪽에 쌓아 올려 밭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밭은 항상 아래로부터 물기가 스며들어 늘 비옥한 상태로 작황이 좋아 떼노츠띠뜰란의 대 인구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치남빠들은 호수 물의 정화작용도 했을 것이다. 치남빠스는 메시까 족의 영역을 넓혀주고 경계를 짓는 역할을 했다. 떼노츠띠뜰란은 작은 섬들이 수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섬과 섬 사이는 통나무를 깎아 만든 바닥이 평평한 작은 카누를 타고 왕래하였다. 그리고 섬과 호숫가를 잇는 대 도로와 수로, 다리 등을 만들었다.

 

  치남빠스의 경작지...고대 아스떼까의 치남빠스를 상상할 수 있다.

 

 

  국립인류고고학 박물관의 떼노츠띠뜰란 조형물


   떼노츠띠뜰란은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도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담장으로 둘러싸인 떼오깔리(중앙광장)가 있고 각 구역마다 떽빤(궁전)이라 불리던 건물과 여러 개의 신전등 공적인 용도의 건물들과 가옥들이 있었다. 도시를 관통하여 각 방향으로 네 개의 대로가 놓여 호수 외부와 연결되었다. 떼노츠띠뜰란의 북쪽에 위치한 작은 섬인 뜰라뗄롤꼬는 아스떼까 시대에 가장 큰 상업지구로 대규모의 띠앙기스(시장)가 있었다. 뜰라뗄롤꼬는 이전에 다른 부족이 지배했었으나 1471년 아스떼까에 영입되었다. 오늘날 소깔로에서 몇 블록 위에 세 문화 광장이 있는 뜰라뗄롤꼬가 바로 그곳이다.

  

   떼노츠띠뜰란은 한 변이 4km인 정방형으로 돌과 착색 백토로 지어진 약 6만 호의 가옥이 이탈리아의 베니스처럼 골목골목 규칙적인 운하로 배열되어 있고 십자 형태로 시원하게 뚫린 중앙광장의 교차로 지점에는 황금빛의 거대하고 화려한 피라미드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고 한다. 신전들은 주신인 위찔로뽀츠뜰리와 비의 신 뜰라록에게 봉헌된 높이 40m에 각 변이 100m에 이르는 대 신전들과 떼오띠와깐의 신인 시뻬 또떽(가죽이 벗겨진 주인)에게 봉헌된 소 신전들이다.

 

   뜰라록과 위찔로뽀츠뜰리에게 봉헌된 주 신전..오늘날의 뗌쁠로 마요르

 

  소깔로에서 볼 수 있는 주 신전(뗌쁠로 마요르) 유적지


   뜰라록은 구름, 번개, 비, 산에서 솟는 물을 지배하는 신이고 시뻬 또떽은 풍요로운 봄과 청춘의 신으로서 어머니인 대지를 의미한다. 그는 농경과 지배의 신이자 희생의 상징이다. 이미 떼오띠와깐 시대에 시뻬 또떽을 위한 봄맞이 축제에서 대지를 덮는 신록이 소생하는 봄을 상징하는 의미로 신관은 젊은 여성의 가죽을 덮어쓰는 의식을 진행했다. 이 잔혹한 풍습은 아스떼까까지 전해졌다. 위찔로뽀츠뜰리를 위한 인신공양까지 소름끼치는 의식에도 불구하고 도심지에는 대규모의 저자거리와 공원 그리고 동물원까지 갖추고 있었고 멀리서 보면 도시 전체가 하얗게 빛났다고 한다.

 

  비의 신 뜰라록

 

   200년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아스떼까 제국은 중미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메시까-떼노츠띠뜰란의 놀라운 권력은 아스떼까의 전사들과 정부에 의해 통제된 세금체계와 인신공양을 하던 종교로 유지하였다. 아스떼까의 도시, 사회, 정치적 구조의 모든 행위들은 여러 신들에 의식을 드리던 것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졌다. 1519년 꼬르떼스가 스페인 군을 이끌고 왔을 때 제국은 번영의 절정기에 이르러 영화를 누리고 있던 중이었다.

 

  뗌쁠로 마요르에 있는 위칠로뽀츠뜰리 신전의 착-몰

  

  아스떼까 초기의 착-몰...안고있는 그릇에 희생자의 심장을 담았다. 

 

   떼노츠띠뜰란은 그 당시 인구 4만 명이던 런던의 5배, 인구 10만의 파리보다 큰 규모와 약 20만 호의 건물 그리고 인구 30만을 헤아리는 대도시였다.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규모가 크고 잘 정비되어 있었으며 활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도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도회적이고 세련된 시민들은 화사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고 한다.

   

  금보다 귀하게 여겼던 청옥 세공품들

 

   아스떼까의 신들을 그림문자로 기록한 책

 

   당시 여인의 모습...양갈래로 땋은 머리를 가운데로 모아 묶은 모습이 우리의 트레머리와 비슷하다.

 

   떡살(^^;;)처럼 생긴 뇌문무늬 인장...토기 면을 장식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대기에 따르면 스페인정복자들은 베니스를 연상시키는 도시구조 외에도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구조와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규모가 큰 인구 등으로 당혹하였으며 아스떼까를 정복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기록하였다.

 

  스페인이 오기전까지 쓰던 전사들의 무기...방패와 돌칼들

 

    아스떼까의 다섯 번째 태양


   고대인들은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자연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신으로 숭배한다. 아스떼까의 우주는 천상 13층과 지하 9층으로 나뉘어 있고 지상세계는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우주의 중심에 있다. 세계는 그 중심을 기점으로 동서남북으로 나뉘며 상징 색을 가지고 있다.

 

   동은 태양이 떠오르는 빛과 풍요의 방향으로 하얀색, 북은 죽음과 어둠의 나라로 검은색, 서는 태양이 사는 나라로 노을의 빨간색과 녹색, 남은 태양의 진로 왼쪽에 있는 방향으로 가시나무가 있는 땅의 노란색 또는 푸른색으로 표현된다. 이는 동과 남이 바뀐 우리의 주남 현북 청동 백서와 유사하다.

 

   고대인들이 우주의 상징으로 형상화 한 네잎사귀 꽃...우리네 연화무늬와 비슷.


   아스떼까인들을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한 원인은 그들의 우주진화론에 있다. 우주는 정체하지 않고 항상 운동하며 멸망과 탄생을 거듭한다. 마야와 유사한 우주관을 가진 아스떼까의 우주는 다섯 번 창조되었다. 그들의 시대까지 네 개의 종족과 네 개의 태양시대가 존재하였다.   

 

  떼오띠와깐의 태양신...허기져 지친 모습

 

   첫 번째 태양은 나우이-오셀로뜰(4의 재규어)로 4008년을 지속하다가 재규어가면을 쓴 떼스까뜰리뽀까(전쟁의 신)에 의해 멸망하였다. 두 번째 태양은 나우이-에헤까뜰(4의 바람)로 4010년을 지속하다가 께찰꼬아뜰(창조 주)로 나타난 거대한 태풍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생존자들은 원숭이가 되어 산으로 올라갔다.


   세 번째 태양은 나우이-뀌아위뜰(4의 불비)인데 4081년을 지난 뒤 거대한 이빨과 커다란 눈을 가진 뜰라록(비와 번개의 신)으로 나타난 불의 비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생존자들은 새로 변하였다. 네 번째 태양은 나우이-아뜰(4의 물)로 5026년을 지난 뒤 대 홍수로 멸망하였다. 그 후 한 남자와 여자만이 생존하였는데 이들은 커다란 아우에우에떼(사이프러스의 일종)나무 아래로 피신하자 이에 떼스까뜰리뽀까는 불복종에 대한 징벌로 이들을 개로 변하게 한 뒤 머리를 잘라 꽁무니에 붙여 이들을 동서남북에 배치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다섯 번째 태양의 시대로 나우이-올린(4의 움직임)이라고 부른다. 아스떼까의 예언에 따르면 다섯 번째 태양은 지진과 기아로 멸망한다고 한다. 나우이-올린은 해골처럼 생긴 서쪽괴물인 치치미메로 모든 인간을 죽일 것이라고 한다. 현재 멕시코시티에 있는 국립인류학박물관의 메시까 실 정중앙에 전시되어 있는 커다란 태양의 돌은 아스떼까의 다섯 번의 태양시대와 우주관이 함축되어 있는 태양력이다. 이 태양력 한가운데에 혀를 쑥 빼문 채 피곤에 지친 모습을 한 다섯 번째의 태양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멕시코시티에  있는 국립고고인류학 박물관...멕시코시티를 방문한다면 꼭 방문해야할 곳.

 

 

   국립고고인류학 박물관의 메시까 실 전경. 앞에 해태처럼 생긴 조각은 희생자의 심장을 담던

   용도로 꽈우시깔리로 불림. 저 뒤쪽으로 태양의 돌이 보인다. 이 모든 작품들이 철기가 아닌 

   단단한 돌과 단순한 도구로만 만들어 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다.  

 

 

   아스떼까의 우주관이 담긴 태양의 돌...현재 멕시코에서 쓰는 동전에 이 문양이 쓰인다.

 

   아스떼까 우주관에 의하면 현 시대는 기원전 3114년 8월 12일 시작되어 서기 2012년 12월 22일 끝이 난다고 한다. 그 날은 태양의 돌에 새겨진 ‘4의 운동’의 날이다. 그리고 365일의 태양력과 260일의 종교 력이 52주년을 주기로 일치하는데 이 주기가 끝나는 날은 불길한 날이라고 여겼다.

 

   멕시코시티 남쪽 "별의 언덕"에서 펼쳐진 새 불 의식의 재현

 

  매 52년마다 새 불을 지폈다.

 

   이러한 우주관을 바탕으로 아스떼까인들은 52주년 및 104주년이 끝날 때마다 죽음에 임박하듯 공포와 불안에 떨었으며 늙고 지친 다섯 번째 태양의 멸망을 늦추기 위해 갖은 애를 썼는데 그 하나가 인신공양이며 새 신전을 건조하거나 새로 덧씌우기도 하였던 것이다.

 

  떼노츠띠뜰란의 주신전(뗌쁠로 마요르) 은 스페인이 침략하기 전에 6번 증축이 있었다.

 

   다섯 번째 태양의 탄생


   아스떼까의 신화에 따르면 네 개의 태양이 지배하던 네 번의 시대가 지났다. 다섯 번째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오랫동안 빛도 온기도 없이 세상이 온통 암흑뿐이었다. 네 번의 실패 끝에 신들은 떼오띠와깐에 다시 모여 어떻게 하면 세상을 밝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신들은 신성한 모닥불 주위에서 유일하게 어둠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끝에 단 한번에 영원의 태양을 만들기 위해 신들 중 하나가 희생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다섯번째 태양의 탄생지인 떼오띠와깐. 오른쪽이 태양신전 도로 끝이 달 신전.


    소라고둥의 신이자 허영심 많은 부자신인 떽시체까뜰이 태양이 되기로 하였지만 아무도 달이 되려 하지 않았다. 신들은 병들고 가난하여 혐오스런 나나와친을 지목하였다. 그는 비록 황금심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몸은 부스럼과 종양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나와친이 이를 받아들이자 신들을 두개의 거대한 제단을 만들었는데 떽시체까뜰을 위해서 태양신전을, 나나와친을 위해 달 신전을 지었다. 그리고 중앙대로에 거대한 화롯불을 만들었다. 두 신은 불에 몸을 던지기 전 13일간 단식과 정화를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태양 신전과 달 신전. 태양신전은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 다음으로

  세계에서 3번째 큰 피라미드.

 

    그러나 막상 희생의 순간이 오자 떽시체까뜰은 불에 뛰어들기 전에 세 차례나 망설이다 결국 네 번째 시도에서 물러났다. 반면 가난한 신 나나와친은 첫 번째 시도에서 기꺼이 활활 타오르는 불속으로 자신을 던졌다. 이에 떽시체까뜰은 불에 뛰어 드는 것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들 두 신의 뒤를 이어 독수리와 재규어도 불어 뛰어 들었다. 그로부터 13일이 지나서 14일이 시작되는 날 독수리가 부리에 거대하고 빛나는 공을 물고 나왔다. 그 뒤를 이어 재규어도 첫 번째 것과 같은 공을 물고 나왔다.

 

   떼오띠와깐 태양 신전과 달 신전

 

    이를 지켜보던 우리의 아버지 신 께찰꼬아뜰은 두개의 태양이 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게다가 떽시체까뜰은 주저하지 않았던가. 그는 토끼의 귀를 잡고 두 번째 공을 향하여 힘껏 던졌다. 공은 크기와 밝기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얼굴에 영원히 토끼모습이 새겨지게 되었다.


   한편 새 태양은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신들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새 태양은 ‘나는 너의 피를 원하며 왕국을 원한다.’고 거만하게 대답했다. 이에 신들은 새 태양은 피로 양분을 섭취해야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참여한 다른 신들을 희생시켜 그 피를 다섯 번째 태양에게 바치라고 바람의 신 에헤까뜰에게 명령했다. 우리의 아버지 신에게 ‘태양 새’라고 불리는 다섯 번째 태양은 금 의자에 위엄 있게 앉아 태양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후 떼오띠와깐은 움직임의 태양 올린또나띠우의 탄생지가 된 것이다.


    아스떼까에서는 이렇게 세상의 빛인 태양이 탄생했다. 신들의 자기희생을 통해서 태양이 태어난 것처럼 태양은 신의 창조물 즉 인간의 희생을 통해 계속 빛날 것이다.


    태양신 또나띠우는 부단히 타오르는 힘의 상징으로 밤에 죽었다가 아침에 다시 태어나는 신이다. 그러나 열기와 갈증으로 피곤에 지쳐 혀를 쑥 빼물고 나이를 먹어 주름잡힌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날마다 인신공양으로 바쳐지는 희생자의 심장과 피를 요구하는 잔인한 신이다.

 

   스스로 신이 선택한 민족이라고 생각하였던 아스떼까 사람들은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멸망을 늦추기 위해 태양신에게 살아 있는 인간의 심장을 바쳤던 것이다. 태양과 전쟁의 신 위찔로뽀츠뜰리에게 봉헌된 신전에서는 약 8만 명의 인간제물을 바쳐 종말이 오는 것을 늦추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예언과 우연 그리고 멸망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연의 역사는 아스떼까 제국의 멸망을 자초한 결과가 되었다. 백인 형상의 께찰꼬아뜰의 도래라는 고대예언이 들어맞은 것이다. 아스떼까 사람들은 하얀 피부에 갈색수염이 난 얼굴을 한 께찰꼬아뜰이 떼스까뜰리뽀까에게 쫓겨날 때 먼 훗날 동쪽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예언을 남기고 간 신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멕시코 동쪽바다로 스페인 군인들이 들어온 것은 우연이아니라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꼬르떼스라는 침략자로 환생한 께찰꼬아뜰에 의해 재래한 것이 되어버린 셈이다. 일부 학자들은 고대아메리카 문명의 신화에서 하나같이 하얀 피부에 갈색수염을 한 비슷한 용모에 다시 돌아온다는 예언을 남기고 떠나간 창조주들이 고대 바이킹들이 아니었을까하는 설도 주장한다.


    깃털 뱀 께찰꼬아뜰


    전설에 의하면 ‘1갈대 해’에 아버지 믹스꼬아뜰과 어머니 치말마 사이에 께찰꼬아뜰인 ‘세 아까뜰 또삘찐’ 왕자가 태어났다. ‘2토끼 해’에 그는 똘란친꼬 또는 똘란 시꼬꼬띠뜰란에 왔다. 그는 청옥과 금, 은으로 만든 궁전을 지었다.  ‘5집 해’에 똘떼까 사람들이 똘란에서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그는 네 개의 궁전을 짓고 절제된 생활을 했으며 강에서 가시로 자기 몸을 찌르는 희생의식도 치렀다. 그리고 빛을 주는 피의 신과 여신에게(하늘신과 별신) 에게 뱀, 새, 나비 등을 봉헌하면서 기도했다. 그의 시대에 그는 수많은 것을 창조했고 풍부한 똘떼까 예술의 걸작품들이 탄생하였다. 이후 그는 더 이상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청옥과 깃털, 금과 은 위에 앉아 은거하였다.


   마법사들은 그에게 인신공양을 하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부하였고 그것은 떼스까뜰리뽀까, 이우미에까뜰, 똘떼까뜰을 괴롭혔다. 그들은 께찰꼬아뜰이 그의 도시를 떠나게 만들자’고 모의했다. 떼스까뜰리뽀까가 께찰꼬아뜰의 집에 가서 이렇게 말했다. ‘사제들의 군주시여. 당신에게 당신의 몸을 보여줄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께찰꼬아뜰의 손에 거울을 쥐어주었다. 거울을 보았을 때 그는 낙담하였다. 그 얼굴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말하길 ‘나는 사람들이 나를 보기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겠다. 나는 여기서 머물련다.’ 고 말했다. 

 

  중미 문명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로 쓰였던 흑요석. 바늘부터 칼, 거울까지 다양한 용도르 쓰임.


   그때 이우미에까뜰과 똘떼까뜰이 용설란 술인 뿔께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께찰꼬아뜰은 ‘나는 마시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들이 ‘손가락으로 맛만 보시오.’하고 권했다. 맛을 본 후 께찰꼬아뜰은 뿔께를 다섯 바가지나 마셨다. 께찰꼬아뜰은 말하길 ‘가서 내 손위누이 께찰뻬따뜰을 모시고 와라. 함께 마시겠다.’ 그러나 께찰꼬아뜰은 너무 취해서 누이와 근친상간을 저지르고 말았다. 

 

  깃털관을 쓰고 꼬빨 향로로 영혼을 치료하는 사제.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달았을 때 께찰꼬아뜰은 너무 부끄러워 뜰리얀 뜰라빠얀으로 떠나야 했다. ‘1갈대 해’가 가까워 왔을 때 깃털치장을 하고 청옥마스크를 쓰고 스스로 밝게 빛난 께찰꼬아뜰은 은하수 둑에 앉아 울었다. 장미울타리는 높게 자라났고 모든 종류의 새들이 다 나타났다. 그의 심장은 하늘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 ‘새벽 별’이 되었다.

 

   아스떼까의 그림문자 달력. 3 갈대 해 라는 의미다.

 

    자신들이 위대한 똘떼까의 후예들이라고 믿었던 아스떼까 사람들은 언젠가 신에 버금가는 위대한 께찰꼬아뜰이 그를 함정에 빠지게 한 자와 그 추종자들에게 복수하러 돌아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스떼까의 멸망


   1519년, 마지막 황제 목떼수마 2세는 하얀 피부와 갈색수염을 가진 꼬르떼스를 동쪽에서 귀환한다는 예언의 또삘찐(께찰꼬아뜰)으로 오해하여 침략자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꼬르떼스는 아스떼까의 적인 이웃 부족들과의 연합전선을 펴서 1521년 제국을 파괴하였다. 아스떼까의 멸망은 그때까지 다른 대륙의 어떤 문명과도 접촉이 없이 고립되어 발전해 왔던 중미고대문명의 종말이었다. 꼬르떼스는 떼노츠띠뜰란을 악마의 도시라며 철저히 파괴하고 그 위에 스페인 식민지를 세웠다. 그곳이 바로 오늘날 멕시코시티다.

 

   어느 맑은 날의 멕시코 시티

 

   이후 멕시코시티는 호수 물을 빼고 매립하며 점차 확대되어 오늘날의 거대한 코스모폴리탄이 되었다. 잘 정비된 놀라운 운하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섬 떼노츠띠뜰란은 현재 멕시코시티의 구시가지 구역으로 고대도시의 모습은 상상조차 해볼 수 없다.

 

   중앙에 있는 광장이 오늘날 멕시코시티의 심장 소깔로이자 고대 아스떼까의 수도 떼노츠띠뜰란이

   있었던 약 750년 역사의 유서깊은 곳이다.

 

   하지만 멕시코시티 남동쪽 외곽에 위치한 인공 섬 치남빠스가 일부 남아 있어 아스떼까 시대의 향수를 느낄 수 있다. 이제는 깊이 약 2m 정도의 수로를 지나다니며 뱃놀이를 즐기는 관광유원지가 되어버린 소치밀꼬가 그곳이다. 소치밀꼬는 아스떼까의 대지 위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가장 귀한 꽃이라는 뜻의 소치케찰 여신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소치밀꼬의 치남빠스...옛 사진

   

   오늘날의 소치밀꼬. 여전히 농사도 짓지만 배타고 수로를 따라 흐르며 즐겁게 노는 관광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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